배신이 무너뜨린 자리, 신실이 여는 문
본문: 역대상 7장 1절 ~ 9장 34절
여는 말
어제 우리는 궤가 안식한 자리에서 노래가 시작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짐을 내려놓은 손에 하나님이 찬송을 얹어 주셨습니다.
오늘은 그 노래하는 사람들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봅니다. 그리고 오늘로 아홉 장에 걸친 명단이 끝납니다. 아담에서 시작한 그 이름의 줄이 마침내 어디에 도착하는지, 오늘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아주 이상한 곳이 하나 있습니다. 7장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 순간 없어진 지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스불론이 없습니다. 단도 없습니다. 납달리는 딱 한 절뿐입니다.
"13 납달리의 아들들은 야시엘과 구니와 예셀과 살룸이니 이는 빌하의 손자더라"(대상 7:13)
한 절입니다. 레위는 팔십일 절인데 납달리는 한 절입니다. 그리고 두 지파는 아예 사라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명단을 보면서 무엇을 느꼈을까요? 페르시아 제국 변방의 초라한 공동체인 이스라엘의 잇사갈과 베냐민을 군사 강국처럼 그려 놓았습니다. 이 역설을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변하는 환경 속에서 변하지 않는 원리를 찾으라!"
오늘 우리는 훼손된 명부에서 시작해서, 아침마다 문을 여는 사람들에게서 끝나겠습니다.
1. 훼손된 명부, 그래도 세어진 이름 (7장)
"5 그의 형제 잇사갈의 모든 종족은 다 용감한 장사라 그 전체를 계수하면 팔만 칠천 명이었더라"(대상 7:5)
"7 … 다 그 집의 우두머리요 큰 용사라 그 계보대로 계수하면 이만 이천삼십사 명이며"(대상 7:7)
7장을 읽으면 계속 같은 말이 반복됩니다. "용감한 장사", "큰 용사", "능히 출전할 만한 자." 히브리어로 기보레 하얄림입니다. '용맹과 힘을 갖춘 군사'라는 뜻입니다. 이 명단은 족보라기보다 군사 인구조사에 가깝습니다.
성도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명단을 읽는 사람들은 군대가 없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 아래에서 무기를 들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자꾸 "용사"라고 부릅니다.
"포로기 때 여기저기 흩어져서 무기력한 상태였지만, 하나님의 눈에 그들은 여전히 주의 군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7장 마지막 절이 이 장의 정점입니다.
"40 이는 다 아셀의 자손으로 우두머리요 정선된 용감한 장사요 방백의 우두머리라 출전할 만한 자를 그들의 계보대로 계수하면 이만 육천 명이었더라"(대상 7:40)
"정선된"이 히브리어 베루림입니다. '순수하게 하다', '엄선하다', '분리하다'라는 뜻의 동사 바라르의 수동 분사형입니다. 이 단어는 족보에 기록된 자들이 단순히 혈통으로 이어져 온 무리가 아니라, 특별한 사명과 책임을 위해 철저한 검증을 거쳐 선별된 자원임을 말합니다.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지파의 실체가 모호해진 상황 속에서도, 역대기 저자는 이 수동 분사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여전히 정제되어 보존되고 있음을 부각합니다.
40절은 스무 단어로 된 가장 긴 결어이며 칭호가 가장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은 칭호의 의미에 의해서뿐 아니라, 그 수량과 반복에 의해서도 인정받은 자들이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그 화려한 칭호 뒤에 붙은 숫자를 보십시오. 이만 육천 명입니다. 민수기 1장에서 아셀은 사만 일천오백 명이었고, 민수기 26장에서는 오만 삼천사백 명이었습니다. 반으로 줄었습니다.
한 절 안에 가장 화려한 칭호와 가장 쪼그라든 숫자가 나란히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 아닙니까.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불리는데, 실제로 우리 손에 있는 것은 이만 육천 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이름을 그렇게 부르십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슥 4:10)
그리고 이 장 한복판에 짧은 이야기 하나가 끼어 있습니다.
"21 … 그가 또 에셀과 엘르앗을 낳았으나 그들이 가드 원주민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내려가서 가드 사람의 짐승을 빼앗고자 하였음이라 22 그의 아버지 에브라임이 여러 날 슬퍼하므로 그의 형제가 가서 위로하였더라 23 그리고 에브라임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 집이 재앙을 받았으므로 그의 이름을 브리아라 하였더라 24 에브라임의 딸은 세에라이니 그가 아래 윗 성 벧호론과 우센세에라를 건설하였더라"(대상 7:21~24)
성도 여러분, 이 네 절 안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아들 둘이 죽었습니다. 아버지가 여러 날 슬퍼했습니다. 형제들이 와서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이름이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안의 딸이 성읍을 세웠습니다.
22절의 "형제가 가서 위로하였더라". 애곡의 자리에 형제가 오는 것, 이것이 성경적 위로의 모양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성경 전체에서 여성이 도시를 건설했다고 기록된 유일한 자리입니다.
"역대기 기자는 이 기사를 일시적 손실과 좌절이 섭리적으로 극복된 예로 삽입한다. 포로라는 좌절이 일시적일 뿐이었음을 청중에게 상기시키는 데 이보다 좋은 방법이 있겠는가?"
재앙이라는 이름의 아이가 태어난 그 집에서, 성읍을 세우는 손녀가 나왔습니다!
2. 흩어졌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거주하였더라 (8장)
8장은 다시 베냐민입니다. 7장 6~12절에서 이미 다뤘는데 왜 또 합니까. 그것도 훨씬 길게.
8장을 읽어 보면 이 지파가 어디 어디에 있었는지가 나옵니다. 게바, 모압 땅, 오노, 롯, 아얄론, 기브온. 흩어져 있었습니다. 뿔뿔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긴 명단이 이렇게 묶입니다.
"28 그들은 다 가문의 우두머리이며 그들의 족보의 우두머리로서 예루살렘에 거주하였더라"(대상 8:28)
흩어졌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이것이 8장의 신학적 정점입니다.
그리고 그 명단의 끝에 아무 예고 없이 한 이름이 나옵니다.
"33 넬은 기스를 낳고 기스는 사울을 낳고 사울은 요나단과 말기수아와 아비나답과 에스바알을 낳았으며"(대상 8:33)
이스라엘의 첫 왕이 여기서 등장합니다. 팡파르도 없고 설명도 없습니다. 사무엘상 8~10장의 그 요란한 이야기, 백성이 왕을 구하고 사무엘이 경고하고 기름을 붓고, 그 어느 것도 없습니다. 그냥 족보 한 줄입니다.
역대기 기자는 사울조차 "초록 밤의 황금 등불" 가운데 첫째, 왕권의 가장 이른 열매로 셉니다. 왜냐하면 왕국이라는 개념 자체가 다윗 가문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조용히 지나가는 이유는 큰 변화가 아니라 큰 연속성을 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울의 이름이 여기 있습니다. 실패한 왕입니다. 내일 우리가 읽을 10장에서 그는 길보아에서 죽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족보가 열두 세대나 더 이어집니다.
"왕조가 무너졌다는 사실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 가족의 자리를 제거하지 않았다."
그리고 9장 38절 "그들의 친족들과 더불어 마주하고 예루살렘에 거주하였더라".
"그들에게조차 소망의 표지가 있었다."
3. 마알로 무너지고, 에무나로 다시 서다 (9장)
이제 아홉 장의 명단이 결론에 이릅니다. 그런데 그 결론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1 온 이스라엘이 그 계보대로 계수되어 그들은 이스라엘 왕조 실록에 기록되니라 유다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더니"(대상 9:1)
성도 여러분, 여덟 장 반을 달려온 명단이 포로로 끝납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어떻게 적습니까. 앗수르가 강해서가 아닙니다. 바벨론이 커서가 아닙니다.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이 단어가 히브리어 마알입니다. 우리가 이번 주에 세 번째로 만나는 단어입니다.
2장 7절 아갈, 5장 25절 요단 동편 지파, 그리고 오늘 9장 1절 유다.
이 단어는 요구에 미달한 정도가 아니라 인격적 거부를 말합니다. 부부의 불충(민 5:12)에도 쓰이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주의 군사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 군대가 무너진 것은 강한 적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여기가 명단의 바닥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을 보십시오.
"2 그들의 땅 안에 있는 성읍에 처음으로 거주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느디님 사람들이라"(대상 9:2)
성도 여러분, 한 절 만에 판이 바뀝니다."포로는 불신실의 결과였고(9:1), 귀환은 하나님의 연속성이었다(9:2). 역대기는 한 절 안에 심판과 회복을 함께 적는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누가 먼저 왔느냐입니다. 왕이 아닙니다. 장군이 아닙니다. 상인도 아닙니다. 제사장, 레위 사람, 그리고 느디님 사람입니다.
"느디님"이 히브리어 네티님인데, '주다', '바치다'라는 뜻의 동사 나탄의 수동 분사형에서 굳어진 이름입니다. '주어진 자들', '바쳐진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성전에서 물을 긷고 나무를 패던 사람들, 대개 이방인 전쟁 포로 출신이었습니다. 영어 성경은 이를 'temple servants(성전 종들)'로 옮깁니다. 귀환자들의 명단에 이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귀환 공동체가 단순히 혈통적 이스라엘을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성전 제의를 구동하기 위한 체계를 세밀하게 재건했음을 증명합니다.
폐허가 된 도시에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예배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생명의 삶 한 절 묵상이 이 절에 붙인 문장이 오늘 아침의 정확한 요약입니다.
"귀환 공동체의 재건은 경제적 풍요나 군사적 준비가 아니라, 예배의 회복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9장에서 가장 길게, 가장 자세히 다뤄지는 사람들에게 가 봅시다. 문지기들입니다.
"22 택함을 입어 문지기 된 자가 모두 이백열두 명이니 이는 그들의 마을에서 그들의 계보대로 계수된 자요 다윗과 선견자 사무엘이 전에 세워서 이 직분을 맡긴 자라"(대상 9:22)
"문지기"가 히브리어 쇼아림입니다. 문을 뜻하는 명사 샤아르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단순히 문을 열고 닫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부정한 자나 자격 없는 자가 거룩한 성소 구역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경계를 지키는 영적 파수꾼들이었습니다.
23절의 "그 순차를 좇아 … 지켰는데"는 미쉬메로트입니다. '지키다'라는 뜻의 동사 샤마르에서 온 말인데, 제의적 문맥에서는 외부의 오염이나 율법의 위반으로부터 성소의 거룩함을 방어하기 위해 부과된 경계의 의무, 곧 군사적 규율에 가까운 종교적 직무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문을 지키는 것은 출입 통제가 아니라 거룩함을 수호하는 영적, 물리적 전투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22절의 마지막 부분에 오늘의 열쇠가 숨어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이 직분을 맡긴 자라"로 옮겼는데, 히브리어 원문은 베에무나탐입니다. '그들의 신실함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에무나, 신실함, 충성됨. 그리고 이 단어가 9장에 세 번 나옵니다. 22절, 26절, 31절.
이 단어의 어근은 "신뢰성"인데 역대기에서는 아예 "신임의 직분" 자체를 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문지기의 직무 이름이 곧 '신실함'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을 보십시오. 나라를 무너뜨린 것은 마알(배신)이었습니다. 나라를 다시 세운 것은 에무나(신실함)였습니다. 같은 관계에서 한쪽으로 가면 무너지고 다른 쪽으로 가면 세워집니다.
그리고 그 신실함이 실제로 무엇이었습니까.
"26 이는 문지기의 우두머리 된 레위 사람 넷이 중요한 직분을 맡아 하나님의 성전 모든 방과 곳간을 지켰음이라 27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맡은 직분이 있으므로 성전 주위에서 밤을 지내며 아침마다 문을 여는 책임이 그들에게 있었더라"(대상 9:26~27)
"아침마다 문을 여는 책임."
성도 여러분, 이보다 소박한 직무가 있겠습니까. 설교하는 것도 아니고, 제사를 드리는 것도 아니고, 노래하는 것도 아닙니다. 밤새 성전 곁에서 자고, 아침에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은 찬양의 시간이자 희생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문을 열지 않으면 그날 예배가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이 직무의 영적 계보를 짚습니다. 20절에 비느하스가 나옵니다. 성소의 거룩함을 목숨 걸고 지킨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22절에 사무엘이 나옵니다. 어린 사무엘이 무엇을 했습니까. 성전 문을 열었습니다. "사무엘이 아침까지 누웠다가 여호와의 집의 문을 열었으나 그 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삼상 3:15).
선지자가 되기 전, 사무엘은 문지기였습니다.
이제 마지막 절입니다.
"33 또 찬송하는 자가 있으니 곧 레위 우두머리라 그들은 골방에 거주하면서 주야로 자기 직분에 전념하므로 다른 일은 하지 아니하였더라"(대상 9:33)
"다른 일은 하지 아니하였더라"가 히브리어 페투림입니다. '벗어나다', '면제되다'라는 뜻으로, 징집이나 노역에서 면제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특권적 면제의 원인은 '왜냐하면'이 이끄는 하반절에 있습니다. 이들은 '밤낮으로' 그 사역에 결박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면제라는 특권은 주야로라는 무한대의 종교적 노동에 결박되기 위한 필요조건이었습니다.
면제받은 이유가 더 매여 있기 위해서였습니다!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34:1)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계 4:8)
맺는 말
성도 여러분, 오늘로 아홉 장의 명단이 끝났습니다. 다시 한번 이 사흘을 꿰어 봅시다.
아담에서 시작했고(1장), 굽은 길을 지나 다윗에게 닿았고(2장), 감옥에서 다시 시작했고(3장), 고통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하나님을 불렀고(4장), 부르짖은 세대가 이겼고 배반한 세대가 사로잡혔고(5장), 궤가 안식한 자리에서 노래가 시작되었고(6장), 훼손된 명부에서도 이름이 세어졌고(7장), 흩어졌던 자들이 예루살렘에 거주했고(8장), 마알로 무너진 자리에서 에무나가 아침마다 문을 엽니다(9장).
이 아홉 장이 어디로 갑니까.
이 나무에는 두 가지 열매가 있습니다. 왕권과 제사장직입니다. 유다와 베냐민에서 왕이 나왔고, 레위에서 제사장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저자 시대에는 둘 다 없었습니다. 왕도 없고 대제사장의 영광도 없었습니다.
"제사장-왕 모양의 빈 공간", 그 빈자리를 중심으로만 참 하나님 백성의 그림이 그려진다고 말합니다.
그 빈자리에 누가 서십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히 9:11)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계 5:5)
왕과 제사장이 한 분에게서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문지기들이 아침마다 열던 그 문에 대해 그분이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계 21:25)
문지기의 직분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성취되었습니다. 밤마다 닫히던 문이, 이제는 닫히지 않습니다.
생명의 삶 묵상 에세이가 오늘 이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청소년 공동체를 섬기던 한 사역자가 최선을 다해 말씀을 전했는데 아이들의 반응이 냉랭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렇게 지적하셨다고 합니다. "너는 이 아이들을 한 수 가르칠 대상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는 아이들 앞에서 울면서 사과했고, 그러자 아이들이 다가와 함께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아이들이 이런 말을 건네기 시작했습니다. "전도사님, 무슨 일 있어요? 우리는 동역자잖아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이백열두 명 문지기들이 바로 그 동역자들입니다. 이름도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직무 이름을 '신실함'이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자녀의 신분을 정확히 알게 된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무한한 신뢰를 품고 내일을 향해 나아간다." - R.C.스프로울
오늘 우리가 붙들 말은 이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쪼그라든 숫자에도 여전히 "정선된 용감한 장사"라고 부르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어떻게 보든, 그분이 부르시는 이름이 우리의 정체입니다.
둘째, 무너뜨리는 것도 관계이고 세우는 것도 관계입니다. 마알과 에무나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입니다. 나라가 무너진 것은 적군이 강해서가 아니었고, 다시 선 것은 우리가 강해져서가 아니었습니다.
셋째, 회복은 부르신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폐허의 예루살렘에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왕이 아니라 문지기였습니다. 아침마다 문을 여는 그 한 사람이 없으면 그날 예배가 없었습니다.
오늘 새벽,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오신 것이 바로 아침마다 문을 여는 일입니다. 오늘 하루, 각자에게 맡겨진 그 작은 문 앞에서 신실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오늘의 찬양
새 546장 〈주님 약속하신 말씀 위에서〉 — "주님 약속하신 말씀 위에서 성령 인도 하는대로 행하며." 7~9장이 증언하는 것이 바로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입니다.
새 323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9장 22절, 다윗과 사무엘이 세운 그 직분에 응답한 이백열두 명의 노래입니다.
〈부르신 곳에서〉 —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오늘 본문의 문지기들이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하나님은 반으로 줄어든 아셀을 향해 여전히 "정선된 용감한 장사"라고 부르셨습니다(7:40). 지금 내가 나를 부르는 이름과,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이름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됩니까? 오늘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 무엇을 하겠습니까?
나라를 무너뜨린 것은 마알(배신)이었고 다시 세운 것은 에무나(신실함)였습니다. 내가 맡은 자리 중에 "아무도 모르지만 내가 안 하면 안 되는" 일은 무엇입니까? 오늘 하루의 첫 시간을 문지기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먼저 드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의 모든 봉사자, 주차와 안내와 주방과 음향과 청소와 교사로 섬기는 이들이 자기 직무의 이름이 '신실함'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문을 여는 책임"을 맡은 자의 기쁨으로 그 자리를 지키게 하소서.
우리 교회의 회복이 예배의 회복에서 시작되게 하시고, 흩어져 있던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듯(8:28) 다시 주님 앞에 모이게 하소서. 특별히 신앙이 무너진 자리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에게, 사울 가문에게도 남겨졌던 그 소망의 표지를 보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