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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 역대상 4-6장

2026.09.14큐티와 묵상

어머니가 부른 이름, 그가 부른 이름

본문: 역대상 4장 1절 ~ 6장 81절

여는 말

어제 우리는 아담에서 시작해서 감옥에서 다시 시작하는 명단을 걸었습니다. 오늘은 그 명단이 계속됩니다. 유다의 나머지 자손, 시므온,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 그리고 레위. 여전히 이름뿐입니다.

그 런데 이름들 사이에 이상한 것이 두 번 튀어나옵니다. 하나는 4장 9~10절이고, 또 하나는 5장 18~22절입니다. 그리고 두 대목이 똑같은 것을 말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불렀고,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름만 나열되던 서류 한복판에 갑자기 기도가 터져 나온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저자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두 번의 부르짖음을 따라가고, 그것이 어디에 가서 노래가 되는지 보겠습니다.

1. 어머니가 부른 이름, 그가 부른 이름 (4장)

"9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9~10)

성도 여러분, 야베스라는 사람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안 나옵니다. 족보 한가운데 있는데 앞뒤가 끊겨 있습니다. 알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어머니가 그를 낳으면서 몹시 고생했다는 것입니다.

"수고로이"가 히브리어 베오체브입니다. 이 단어는 해산의 고통과 함께 슬픔과 근심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3장 16절의 고통과 같은 단어입니다.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그러니까 야베스라는 이름은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고대인에게 이름은 그 사람의 성품과 운명을 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평생 무엇을 듣고 살았겠습니까. "고통아, 이리 오너라." "고통아, 밥 먹어라." 태어난 것 자체가 미안한 사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야베스는 그 불길한 이름에 눌려 살 마음이 없었다."

그가 무엇을 했습니까.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9절에서 어머니가 그를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10절에서 야베스가 하나님께 "아뢰었다"고 합니다. 두 동사가 같은 어근입니다. 어머니가 그를 '고통'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이름의 힘보다 더 강력하고 효력이 있으며, 그 능력은 기도를 통해 작동된다. 이름의 힘은 여전하지만, 하나님의 더 큰 능력 앞에는 소용이 없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붙어 있는 이름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이름 말고, 내가 나를 부르는 이름 말입니다. "나는 안 되는 사람." "나는 늘 늦는 사람." "나는 우리 집안에서 실패한 쪽." 야베스는 그 이름을 지우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끝까지 그를 야베스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이름 위에 더 큰 이름을 부를 줄 알았습니다.

그가 무엇을 구했습니까. 네 가지입니다. 둘은 육체적 상황(지역을 넓혀 주시는 것, 환난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둘은 하나님과의 관계(복 주시는 것, 주의 손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형편만 구한 것도 아니고, 영적인 것만 구한 것도 아닙니다.

"넓히시고"가 히브리어 베히르비타인데, '많아지다', '풍성해지다'라는 뜻의 동사 라바의 히필형입니다. 공간을 넓힌다는 의미보다는 개체 수나 질량의 증식과 배가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야베스가 구한 것은 이웃의 땅을 침탈하는 영토의 확장이 아니라, 자신의 영토 안에서 족장들에게 약속되었던 생명의 수적 번성의 축복이 실현되기를 요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네 단계 복의 공식"으로 만들어 외우는 것은 위험합니다. 하나님은 요술램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기도를 그대로 가르치지 않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 이 본문의 요점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그가 기도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요청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방법이 아니라 응답입니다. 공식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4장에는 이 사람 말고도 눈여겨볼 사람들이 더 있습니다. 토기장이입니다.

"23 이 모든 사람은 토기장이가 되어 수풀과 산울 가운데에 거주하는 자로서 거기서 왕과 함께 거주하면서 왕의 일을 하였더라"(대상 4:23)

3장에서 우리는 왕들의 명단을 읽었습니다. 솔로몬, 르호보암, 아비야… 그런데 그 명단 바로 다음에 무엇이 나옵니까. 왕을 위해 그릇을 굽는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이들은 비록 직업이 화려하지 않고 변두리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그 노동이 결국 이스라엘의 통치자를 위한 사역의 일환으로 인정받아 유다 지파의 공식적인 족보 안에 떳떳하게 기록되었습니다. 포로 귀환 후 무너진 성벽과 성전을 재건하며 척박한 일상을 살아 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떠한 직업이라도 하나님의 통치에 기여하는 거룩한 부르심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땀 흘려 일하는 서민들."

성도 여러분, 오늘 새벽에 나가서 하실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릇을 굽는 일일 수도 있고, 서류를 만드는 일일 수도 있고, 아이 밥을 차리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왕의 일을 하였더라"라고 적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2. 부르짖은 세대, 배반한 세대 (5장)

"1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대상 5:1~2)

5장은 장자권을 잃은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르우벤은 태어날 때부터 장자였습니다. 아무 노력 없이 얻은 지위였습니다. 그런데 그 지위를 잃었습니다. "하나님 앞의 지위는 권리가 아니라 특권이다." 이 원리가 르우벤 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장자인 이스라엘 전체(출 4:22; 렘 31:9)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정말 놀라운 것은 그다음입니다. 같은 지파가 한 세대에는 이기고, 다음 세대에는 포로가 됩니다.

"20 도우심을 입었으므로 하갈 사람과 그들과 함께 있는 자들이 다 그들의 손에 패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싸울 때에 하나님께 의뢰하고 부르짖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응답하셨음이라 21 그들이 대적의 짐승 곧 낙타 오만 마리와 양 이십오만 마리와 나귀 이천 마리를 빼앗으며 사람 십만 명을 사로잡았고 22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으니 이 싸움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이라"(대상 5:20~22)

원래 자료에는 5장 10절처럼 짧은 국경 충돌 기록만 있었는데 역대기 기자가 이것을 다섯 배로 확장해서 요단 동편 전 지파 사만 사천칠백육십 명의 영적 전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 직역하면 "왜냐하면 그 전쟁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입니다. 주변 민족과의 전쟁은 비록 그들이 칼과 활로 무장하고 용맹하게 싸워 적을 쓰러뜨렸다 하더라도, 그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근원적 동력은 철저히 하나님께 귀속됩니다.

20절의 "응답하셨음이라"는 히브리어 나에타르인데, 동사 아타르는 향을 피워 연기를 풍기듯 끈질기고 간절하게 '탄원하다', '간구하다'라는 뜻입니다. 여기 쓰인 니팔형은 하나님이 그 간구에 기꺼이 '설득당해 주시다', 혹은 은혜롭게 '응답하시다'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전장에 울려 퍼진 백성의 절박한 탄원이 허공에 흩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그분의 능동적 구원을 이끌어 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여섯 절 뒤를 보십시오.

"25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지라 26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 왕 불의 마음을 일으키시며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시매 곧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사로잡아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강 가에 옮긴지라 그들이 오늘까지 거기에 있으니라"(대상 5:25~26)

"범죄하여"가 히브리어 바이마알루입니다. 어제 우리가 2장 7절에서 만났던 그 마알입니다. 마알은 도덕적 실수를 뜻하는 하타와 달리, 언약이나 신뢰 관계를 심각하게 깨뜨리고 '배신하다', '신뢰를 저버리다'라는 뜻의 매우 무거운 법적 용어입니다. 역대기 저자는 요단 동쪽의 두 지파 반이 포로로 끌려가게 된 원인을 이 마알이라는 단어로 규정합니다. 국가의 패망이 군사적, 외교적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정면으로 파기한 영적 횡령이자 반역 행위임을 엄정하게 평가하는 신학적 어휘입니다.

성도 여러분, 6절과 25~26절의 디글랏빌레셀, 그리고 10절과 20절의 사울 시대, 삼백 년 간격의 두 시대가 한 장 안에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원리가 작동합니다.

사울 때는 부르짖었고, 이겼습니다. 디글랏빌레셀 때는 배반했고, 사로잡혔습니다. 어제 하나님을 의지해 승리한 자들이, 오늘 하나님을 떠나 적군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요단 동편 지파의 실패는 기도와 신뢰를 소홀히 한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다른 신으로 바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열심이었습니다. 여전히 기도했습니다. 다만 다른 데 대고 기도했습니다. 신명기 8장의 언어로 "영적 기억상실"입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 8:12, 14).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

3. 부르짖음이 노래가 되고, 속죄가 되다 (6장)

"1 레위의 아들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대상 6:1)

이제 6장입니다. 지파 족보의 정중앙입니다. 유다 다음으로 가장 깁니다. 팔십일 절입니다. "온 이스라엘의 중심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하나님 자신이 선택하시고 그 뜻대로 기능하는 사역이 있다."

이 장은 세 부분입니다. 제사장 계보(1~15절), 찬양대 계보(31~48절), 그리고 속죄의 직무와 레위 성읍(49~81절).

먼저 제사장 계보의 끝을 보십시오.

"15 여호와께서 느부갓네살의 손으로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을 옮기실 때에 여호사닥도 가니라"(대상 6:15)

아론에서 시작한 대제사장 계보가 포로로 끝납니다. 아론에서 여호사닥까지 스물세 세대를 이어 온 계보가 바벨론 유수에서 멈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문장의 주어가 누구입니까. 느부갓네살이 아니라 여호와이십니다. 포로조차 주님의 행위입니다.

아론에서 솔로몬 성전을 섬긴 아사랴까지 열두 세대, 그리고 여호사닥까지 열한 세대. 그러므로 열두번째 세대가 비어 있습니다. 그 빈 자리에 누가 앉았습니까. 학개 1장 1절을 보십시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 여호사닥의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포로로 끌려갔는데, 아들이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계보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가장 아름다운 자리로 갑시다.

"31 언약궤가 평안을 얻었을 때에 다윗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찬송하는 직분을 맡긴 자들은 아래와 같았더라 32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성전을 세울 때까지 그들이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하되 그 계열대로 직무를 행하였더라"(대상 6:31~32)

광야 시대부터 사사 시대를 거치는 동안 이스라엘의 성막과 언약궤는 일정한 장소에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동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마침내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겨 와 고정된 장소에 안치한 사건을, 역대기 저자는 '언약궤의 안식'으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언약궤가 이동을 멈추고 안식을 얻은 바로 이 시점부터, 다윗은 성전에서 여호와를 찬송하는 직분을 맡은 자들을 체계적으로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궤를 메던 사람들이 노래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레위인의 일은 무거운 성막 기구를 어깨에 지고 나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궤가 안식할 자리를 찾자 그들의 손이 비었습니다. 그 빈 손에 하나님이 주신 새 직무가 무엇입니까. 노래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입니까. 짐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찬송이 시작됩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히 4:9~10)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여러 형태의 봉사 사이에 구별이 없었는데, 각각이 하나님께 드려진 예배로서 그 가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6장의 결론에 해당하는 절이 이것입니다.

"49 아론과 그의 자손들은 번제단과 향단 위에 분향하며 제사를 드리며 지성소의 모든 일을 하여 하나님의 종 모세의 모든 명령대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속죄하니"(대상 6:49)

"이스라엘을 위하여 속죄하니." 이것이 이 긴 명단의 목적지입니다. 온 지파 목록 중에 족장에서 포로까지 끝까지 추적되는 계보는 오직 둘, 다윗의 계보와 아론의 계보뿐입니다. 그리고 둘 다 국가적 재앙을 낳은 '불신실함'의 예 바로 뒤에 놓여 있습니다. 2장 7절 아갈 뒤에 다윗의 계보가, 5장 25절 요단 동편의 마알 뒤에 아론의 계보가 옵니다.

"유다와 레위는 언약을 깨뜨리는 죄조차 속죄될 수 있는 수단이다."

하나님께 열납된 이유는 화려함이 아닙니다. "규례대로"(6:32), "모세가 명령한 대로"(6:49) 순종 안에서 운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락, 레위 성읍입니다. 레위 지파는 땅을 받지 못했습니다. 대신 온 땅에 흩어진 마흔여덟 성읍을 받았습니다. "레위는 땅이 아니라 흩어진 성읍들을 받았다. 온 백성 속에 심긴 제사장직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우리가 흩어져 사는 것도 유배가 아니라 배치입니다.

맺는 말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한 줄로 꿰어 봅시다.

4장, 고통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하나님을 불렀고,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5장, 부르짖은 세대는 이겼고, 부르짖기를 그친 세대는 사로잡혔습니다.

6장, 그 부르짖음이 성전의 노래가 되었고,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 장이 어디로 흘러갑니까. 한 분에게로 갑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성도 여러분, 야베스처럼 부르짖으신 분이 계십니다. 아니, 야베스보다 더 깊이 부르짖으신 분이 계십니다. 겟세마네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환난을 벗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야베스는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고 구했고 하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같은 자리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하셨습니다. 그분이 환난 안으로 들어가셨기 때문에, 우리가 환난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오늘도 하고 계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6장 49절의 "이스라엘을 위하여 속죄하니"가 여기서 완성됩니다. 대제사장의 계보가 여호사닥에서 끊긴 것 같았는데,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 그 자리에 서 계십니다(시 110:4; 히 7:17).

생명의 삶 묵상 에세이가 오늘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든 하지 않든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 뜻대로 될 것이라면, 왜 기도를 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져 본 적 있나요?" 그리고 이렇게 답합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은 기도의 공적을 많이 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삶에 간섭하실 기회를 자주 드리는 것입니다. 제임스 패커의 말을 인용합니다. "만약 우리 자신을 성취자, 창조자, 개혁자로 생각한다면, 가장 깊은 차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원래 우리는 모든 측면에서 궁핍하고 무능하며,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하는 사람들이다."

같은 페이지에 하워드 헨드릭스의 한 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나라를 위기에서 건지실 때 그분을 믿는 사람들이 비록 연약해도 그들의 기도를 사용하신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붙들 말은 이것입니다. 나를 부르는 이름이 무엇이든, 나는 하나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그를 "고통"이라 불렀지만, 그는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를 이렇게 기억합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오늘 하루, 나를 눌러 온 그 이름 위에 더 큰 이름을 부르시기를, 그리고 저녁에는 그 부르짖음이 노래가 되어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찬양

새 86장 〈내가 늘 의지하는 예수〉 — 후렴 "내가 의지하는 예수 나의 사모하는 친구 나의 기도 들으사 응답하여 주시니 미쁘신 나의 좋은 친구." 4장 10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를 그대로 노래합니다.

새 364장 〈야베스의 기도〉 — 야베스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와 겹칩니다.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나를 눌러 온 이름은 무엇입니까? 남이 붙여 준 이름일 수도 있고, 내가 나에게 붙인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야베스는 그 이름을 지우지 못했지만 그 위에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오늘 아침 나는 그 이름 위에 무엇이라고 부르겠습니까?

5장은 한 지파가 한 세대에는 이기고 다음 세대에는 사로잡히는 것을 보여 줍니다. 힐은 그 실패가 "기도를 그친 것이 아니라 기도의 대상을 바꾼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요즘 실제로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말하면서 붙들고 있는 다른 무엇입니까?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 성도들이 야베스처럼 자기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부르짖게 하시고, 그 기도가 번영의 공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셨더라"는 응답의 고백으로 이어지게 하소서. 특별히 이름 없이 "왕의 일"을 하고 있는 성도들, 일터에서, 가정에서,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수고하는 이들을 하나님이 기록하고 계심을 알게 하소서.

한때의 은혜 체험에 안주하다 넘어지는 일이 우리 가운데 없게 하시고, 궤가 안식한 자리에서 찬양이 시작되었듯 우리 교회의 모든 봉사가 저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무너진 예배의 자리가 있다면 오늘 다시 세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