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에서 시작해서, 감옥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본문: 역대상 1장 1절 ~ 3장 24절
여는 말
우리는 2주동안 시편 119편을 진하게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역대상으로 이어집니다.
첫 장을 펴면 이름뿐입니다. 아담, 셋, 에노스, 게난… 오십사 절 내내 이름만 이어집니다. "이건 나하고 무슨 상관인가." 그런데 성도 여러분, 어제의 기도가 "나를 찾으소서"였다면, 오늘 본문은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잃지 않으셨습니다. 이 이름들이 그 증거입니다.
윌콕은 이렇게 말합니다. "눈으로 읽으면 미로지만, 귀로 들으면 먼 북소리처럼 장엄하게 시작한다: 아담!"
"아담: 사람, 인류의 창시자, 인류의 아버지, 하나님 백성의 첫 사람."
셀먼은 역대상 1~9장을 아예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왜 복음입니까. 이 명단을 처음 읽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면 답이 나옵니다. 그들은 칠십 년 포로 생활을 마치고 폐허가 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전은 초라했고, 나라는 없었고, 왕은 사라졌습니다. 그들 마음속의 질문은 하나였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백성인가?"
역대기 기자는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냥 명단을 펼쳐 놓습니다. 그런데 그 명단이 어디서 시작합니까. 다윗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아닙니다. 아담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명단이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를 함께 걸어 보겠습니다.
1. 아담부터 — 가장 약한 시대에 가장 먼 뿌리 (1장)
"1 아담, 셋, 에노스, 2 게난, 마할랄렐, 야렛, 3 에녹, 므두셀라, 라멕, 4 노아, 셈, 함과 야벳은 조상들이라"(대상 1:1~4)
동사가 없습니다. 서술어도 없습니다. 접속사조차 없습니다. 오직 세 사람의 이름만 나란히 배열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통틀어 가장 간결한 구문 중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을 아브라함이 아니라 창조 자체까지 추적하는 것은 대담한 신학적 선언이다."
성도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페르시아 제국의 변방, 인구 몇만의 작은 공동체, 무너진 성벽. 이스라엘이 역사상 가장 약해진 그 시점에 역대기 기자는 가장 먼 뿌리를 말합니다. 자기연민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자기를 더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이야기 안에 자기를 놓는 것입니다.
"다윗, 유다, 이스라엘을 아담과 노아를 포함하는 큰 이야기 안에 놓으면, 포로 후기 유다의 다윗 왕권 상실은 하나님과의 에덴 교제 상실에 비하면 빛을 잃는다."
노아는 있는데 홍수가 없습니다. 4절은 "노아, 셈, 함과 야벳"이라고만 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역대기 기자가 보여 주려는 것은 큰 변화가 아니라 큰 연속성이기 때문입니다.
"10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세상에서 첫 영걸이며"(대상 1:10)
여기 "낳았으니"가 히브리어 얄라드입니다.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입니다. 역대상 족보에 이 단어는 반복되며 세대와 세대를 잇는 언어적 사슬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 평범한 동사가 포로 귀환 이후, 성전과 성벽은 재건되었으나 국가 주권은 회복되지 않은 불안정한 시대에 무엇을 증언합니까. 바벨론의 칼과 기근 속에서도 낳고 낳는 역사는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얄라드는 역사적 단절의 위기를 뚫고 생명을 이어 오신 하나님의 섭리를 증명하는 강력한 신학적 기호입니다.
그리고 1장에는 이스라엘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야벳의 자손(5~7절)에 마대(메대)와 야완(그리스)이 있습니다. 함의 자손(8~16절)에 애굽과 가나안이 있습니다. 포로기 이후의 제국 세력들조차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의 직계 후손이며, 따라서 그분의 주권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43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린 왕은 이러하니라"(대상 1:43)
에돔 왕들 이야기가 열 절 넘게 이어집니다. "죽으매… 대신하여 왕이 되고", "죽으매… 대신하여 왕이 되고." 에돔 왕들은 죽었고, 결국 에돔도 죽었습니다. 나바테아 사람들에게 흡수되어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유다의 왕들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살아서 돌아와 성을 다시 쌓았습니다.
"에서도 정말 번성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그 형제의 가족을 위해 행하신 기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1장에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오십사 절 내내 "여호와"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실제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별력 있는 독자에게는 그분의 활동이 도처에 보인다."
"이 이질적인 이름들을 하나의 이음새 없는 옷으로 묶는 숨은 붉은 줄은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사랑이다."
숨은 붉은 줄!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의 이름이 크게 적혀 있지 않은 날들이 있습니다. 병상의 날들, 실직의 날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평범한 화요일들. 그런데 그 날들을 하나로 꿰는 붉은 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첫 장이 누구에게로 흘러갑니까. 누가복음이 대답합니다.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눅 3:38).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역대기와 똑같이 아담까지, 그리고 하나님까지 소급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2. 유다의 굽은 길 — 죽은 장자, 괴롭힌 자, 애굽 종의 사위 (2장)
"1 이스라엘의 아들은 이러하니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과 2 단과 요셉과 베냐민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더라"(대상 2:1~2)
열두 아들을 다 세웁니다. 하나도 빼지 않습니다. 모두 나열함으로써 "온 이스라엘", 남북 모두가 기자의 시야 안에 있음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북쪽 열 지파는 이미 앗수르에 끌려가 사라진 지 삼백 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도 명단에 넣습니다. 하나님의 명단에서 지워진 이름은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곧장 유다로 들어가는데, 그 첫 문장이 놀랍습니다.
"3 유다의 아들은 에르와 오난과 셀라니 이 세 사람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이 유다에게 낳아 준 자요 유다의 맏아들 에르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죽이셨고 4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유다에게 베레스와 세라를 낳아 주었으니 유다의 아들이 모두 다섯이더라"(대상 2:3~4)
성도 여러분, 잘 보십시오. 역대기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자리가 여기입니다. 그런데 그 첫 등장이 무엇입니까. 심판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죽이셨고."
"악하였으므로"가 히브리어 라아입니다. 나쁜, 악한, 해로운, 망가진이라는 뜻으로, 창조 질서나 율법의 기준에서 벗어나 파괴적이고 불의한 상태를 총칭합니다. 무미건조하게 이름만 나열되던 족보의 흐름 속에 라아라는 윤리적 판단을 내포하는 어휘가 갑자기 개입함으로써, 이 족보가 단순한 호적 등본이 아님이 드러납니다. 언약 공동체의 족보에 편입되는 것은 혈연적 조건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여호와의 눈앞에서 검증받아야만 생명의 책에 그 이름이 보존될 수 있음을 이 형용사가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자가 죽었습니다. "맏아들"이 히브리어 베코르인데, 고대 근동 전통과 율법에 따르면 베코르는 가문의 영적 대표성을 지니며 유산 두 몫을 상속받는 기득권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역대상 1~3장의 계보에서 베코르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유다의 장자 에르, 다윗의 장자 암논 등 명시된 장자들은 종종 범죄나 비극으로 그 자격을 상실하거나 계보의 중심에서 밀려납니다. 구속사가 혈통적 순서나 기득권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의 선택을 따라 흘러간다는 사실을 이 단어가 입증하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그리고 계속 보십시오.
"7 갈미의 아들은 아갈이니 그는 진멸시킬 물건을 범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힌 자이며"(대상 2:7)
여호수아 7장의 아간입니다. 그런데 역대기는 그 이름을 아갈로 바꿔 적습니다. "괴롭게 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아골 골짜기의 언어유희를 이름 자체에 새긴 것입니다. 아간이 지은 죄는 마알, 곧 불신실함입니다.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빼앗는다는 뉘앙스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가 어디에 배치되어 있는지 보십시오.
족보의 서두(2:7), 서사의 서두(10:13), 족보의 끝(9:1), 서사의 끝(대하 36:14).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간 순간부터 바벨론에 멸망하기까지 불신실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명단은 절망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 족보의 이 나쁜 출발에서 회복될 유일한 진정한 소망은 다윗에게 있다."
"34 세산은 아들이 없고 딸뿐이라 그에게 야르하라 하는 애굽 종이 있으므로 35 세산이 딸을 그 종 야르하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였더니 그가 그로 말미암아 앗대를 낳고"(대상 2:34~35)
애굽 종입니다. 그런데 그 종의 후손이 열세 대에 걸쳐 "여라므엘 자손"으로 기록됩니다. 기자는 이 사실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존귀한 엘리사마의 기원으로 내세웁니다.
"혈통이 궁극적으로 누가 하나님께 속하고 누가 속하지 않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 여러분, 정리해 봅시다. 유다 지파의 명단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죽이신 장자. 가나안 여인. 시아버지와의 사이에서 낳은 쌍둥이. 이스라엘을 괴롭힌 아갈. 애굽 종의 사위. 이스마엘 사람 남편. 이것을 감추지 않고 다 적어 놓고, 그 끝에 이렇게 씁니다.
"15 여섯째로 오셈과 일곱째로 다윗을 낳았으며"(대상 2:15)
굽은 길이 다윗에게 닿았습니다!
그리고 천 년 뒤, 이 명단을 이어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마태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쓰면서 일부러 이 여인들을 다시 불러냅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마 1:3).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마 1:5).
역대기 기자가 감추지 않았던 것을 마태도 감추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선택은 혈통이나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 9:8)
3. 감옥에서 다시 시작하는 이름들 (3장)
"1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들은 이러하니 맏아들은 암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둘째는 다니엘이라 갈멜 여인 아비가일의 소생이요"(대상 3:1)
3장은 다윗의 집입니다. 헤브론에서 낳은 여섯, 예루살렘에서 낳은 열셋. 다윗 왕국의 위대함을 이름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5 예루살렘에서 그가 낳은 아들들은 이러하니 시므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 네 사람은 다 암미엘의 딸 밧수아의 소생이요"(대상 3:5)
여기 "밧수아"라는 이름을 주목하십시오. 우리가 아는 밧세바입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에서 그녀를 "밧수아"로 부르는 곳은 여기뿐입니다. 이 이름은 동시에 2장 3절에 나온 유다의 가나안 아내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2장에서 가나안 여인 밧수아를 감추지 않았던 그 손이, 다윗의 집에도 같은 이름을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왕들의 명단이 이어집니다. 솔로몬,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 여호사밧… "매우 뒤섞인 무리"입니다. 잘한 왕도 있고, 못한 왕도 있고, 최악의 왕도 있습니다. 그런데 명단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 열왕기에 나오는 유다 왕들 가운데 이 명단에서 빠진 사람은 아달랴 한 사람뿐입니다. 왜입니까. 그는 아합의 딸이지 다윗 가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이 목록은 왕위 계승 명단이 아니라 혈통 명단입니다. 왕좌에 앉았느냐가 아니라, 다윗의 피가 흐르느냐를 적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심장이 여기 있습니다.
"17 사로잡혀 간 여고냐의 아들들은 그의 아들 스알디엘과 18 말기람과 브다야와 세낫살과 여가먀와 호사마와 느다뱌요 19 브다야의 아들들은 스룹바벨과 시므이요"(대상 3:17~19)
성도 여러분, 이 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사로잡혀 간 여고냐." 왕궁이 아닙니다. 왕좌도 아닙니다. 감옥입니다. 왕조의 최저점입니다. 예레미야가 이 사람에 대해 무엇이라고 예언했는지 아십니까?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의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렘 22:30)
"자식이 없겠고"라고 기록하라! 그런데 역대상 3장 17절은 그의 아들 일곱 명의 이름을 적습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다윗의 계보가 바벨론의 정복과 포로로 꺼져 버렸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다윗의 가계 나무를 살려 두셨다."
그리고 학개 선지자가 그 손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학 2:23). 저주가 뒤집혔습니다.
이제 마지막 절을 보십시오.
"24 에료에내의 아들들은 호다위야와 엘리아십과 블라야와 악굽과 요하난과 들라야와 아나니 일곱 사람이더라"(대상 3:24)
들어 본 적 없는 이름들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다시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근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이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다시 말해 이 명단은 저자 자신의 세대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19절에 스룹바벨의 자녀들이 나옵니다. 므술람은 "회복된", 하나냐는 "야웨는 자비로우시다", 슬로밋은 "평화"입니다. 그리고 조금 뒤 목록에는 하사댜 곧 "야웨가 언약적 사랑을 베푸셨다", 유삽헤셋 곧 "언약적 사랑이 돌아온다"가 나옵니다.
성도 여러분, 포로지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부모가 지어 준 이름이 이것입니다. 회복. 자비. 평화. 언약적 사랑이 돌아온다. 엘료에내의 아들들은 다른 곳에 알려지지 않았고, 그 이름들은 현대 독자에게 완전히 잊힐 만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대기에게 그들은 살아 있는 소망의 공동체적 성육신이다."
"환경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한다. 그러나 연속성이 있다. … 왕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왕권은 존재한다."
왕좌는 사라졌는데 왕가는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 명단이 어디로 갑니까. 사백 년쯤 뒤에 한 사람이 붓을 들어 이렇게 씁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 1:1)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마 1:12)
역대상 3장 17절의 그 이름들이 마태복음 1장에 그대로 다시 나옵니다. 감옥에서 다시 시작한 명단이 베들레헴 구유에 도착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 11:1)
맺는 말
"Way Maker"라는 찬양은 길을 만드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Promise Keeper', 곧 '약속을 지키시는 분'으로 고백합니다. 온 세상이 심판을 받아 물에 잠길 때에도 하나님은 노아의 가정을 남기셔서 그 약속을 이어 가셨고, 세상을 다 덮은 홍수조차 하나님의 약속을 끊지 못했습니다.
약속에서 중요한 것은 약속의 내용이 아니라 약속의 주체라는 것입니다. 전화 금융사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특별한 금융 상품이 있다는 그 약속의 내용에 마음을 빼앗기면, 정작 "당신이 누구인가"를 묻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세 장은 약속의 내용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약속하신 분이 누구신지만 이름으로 증명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붙들 말은 이것입니다.
첫째, 내 뿌리는 내 형편보다 깊습니다. 우리는 자꾸 뿌리를 가문이나 학력이나 성취까지만 파 내려갑니다. 그런데 역대기는 아담까지, 창조까지, 하나님까지 팝니다. 오늘 내가 초라하다면, 그것은 뿌리가 얕아서가 아닙니다. 내가 뿌리를 안 봐서입니다.
둘째, 굽은 길도 그분의 길입니다. 죽은 장자, 가나안 여인, 이스라엘을 괴롭힌 아갈, 애굽 종 야르하. 이 명단은 미화되지 않았습니다. 야펫의 말대로 역대기 기자는 자기 영웅들에 대해서도 이상화를 체계적으로 피합니다. 그런데도 그 길이 다윗에게 닿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닿았습니다. 내 인생의 굽은 구간이 명단에서 나를 지우지 못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감옥에서도 다시 시작하십니다. "자식이 없겠다고 기록하라" 하신 그 사람의 아들 일곱이 기록되었고, 그 손자가 성전을 재건했고, 그 계보에서 그리스도가 나셨습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오늘 새벽, 이름만 오십사 절, 백여 절 이어지는 이 지루한 장을 우리가 함께 읽었습니다. 그 안에 한 이름이 더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이름입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 49:16)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어제 우리는 "나를 찾으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명단을 펼쳐 보이십니다. "내가 이미 찾았다. 여기 있다." —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오늘의 찬양
새 393장 〈오 신실하신 주〉 — 창조의 새벽부터 오늘 아침까지 한 줄로 이어진 신실하심, 곧 오늘 본문 세 장의 주제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1장 1절 아담에서 시작하는 정체성 선언과 정확히 겹칩니다.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나는 내 뿌리를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고 있습니까? 가문과 경력과 성취까지입니까, 아니면 창조하시고 택하신 하나님까지입니까?
역대기 기자는 죽은 장자도, 가나안 여인도, 애굽 종도 명단에서 지우지 않았습니다. 내 인생에서 "이건 명단에서 지우고 싶다" 싶은 한 구간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은 그 구간을 지우셨습니까, 아니면 그 구간을 지나 여기까지 오게 하셨습니까?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가 눈앞의 형편 때문에 창조 때부터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잊지 않게 하시고, 낙심하고 이름 없이 살아가는 성도들, 곧 병상에 있는 이, 일자리를 잃은 이, 홀로 사는 이가 자기 이름이 하나님의 기록에 있음을 알고 위로받게 하소서.
신앙의 세대가 끊긴 듯 보이는 가정들 위에 스룹바벨이 자녀에게 지어 준 이름들, 곧 회복과 자비와 평화와 "언약적 사랑이 돌아온다"가 실제로 임하게 하시고, 우리 교회가 혈통과 배경을 넘어 사람을 품는 포용의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