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서 있고 내 입에 답니다
본문: 시편 119편 89절 ~ 104절
여는 말
어제 우리는 줄 끝까지 갔습니다. 연기 속의 가죽 부대처럼 오그라든 자리에서, 그 끝에 '기도'라는 이름의 자리가 하나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첫 절을 보십시오. 바로 앞 절까지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88절)라고 신음하던 사람이 갑자기 고개를 듭니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89절).
시선이 땅에서 하늘로 옮겨 갔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화면에 들어온 것은 내 형편이 아니라 내 형편보다 오래된 것입니다. 한 주간의 첫 새벽입니다. 오늘 열여섯 절은 그 하늘에서 시작해 내 입술의 맛으로 끝납니다. 하늘에 서 있는 그 말씀이 어떻게 내 입에서 달아지는지, 그 길을 함께 걸어 봅시다.
1. 하늘에 굳게 선 말씀 — 만물이 그의 종 (89~91절)
"89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90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91 천지가 주의 규례들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까닭이니이다" (119:89~91)
89절의 '굳게 섰사오며'(니차브)는 건물의 기둥처럼 확고하게 고정된 상태를 그리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고정된 좌표가 '하늘에'(바샤마임)입니다. 땅은 거짓과 핍박과 조롱이 난무하는 곳입니다. 바로 앞 여덟 절이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인간의 위협도 환경의 변화도 닿을 수 없는 자리에 못 박혀 있습니다.
키드너가 이 세 절의 특징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적이며 세계를 붙드시는 말씀을, 사람을 향한 그분의 율법과 짝지어 놓은 것이다. 둘 다 동일한 질서 잡는 정신의 산물이며, 사람뿐 아니라 '만물'이 그분의 '종'이다."
앨런은 이것을 한 문장으로 정식화합니다. "하나님의 우주적 말씀과 그분의 토라 책은 서로 짝을 이루는 것이다." 별들을 제자리에 붙들어 두는 그 말씀과, 오늘 아침 내가 펼친 이 책이 같은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
91절이 결정적입니다. 여기 쓰인 '규례'는 하나님이 우리의 순종을 위해 쓰시는 바로 그 단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오늘도 그것들은 주의 규례를 위해 대기하고 있습니다. 해와 달이 어김없이 운행하는 것은 그것들이 말씀에 순종하는 종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창조주께 유익하며 창조의 목적을 이룬다. 그런데 사람만 유일한 반역자, 유일한 배신자, 땅의 유일한 무익한 짐이 되겠는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8).
주님도 같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
2. 하마터면 — 그 말씀이 나를 살렸습니다 (92~96절)
"92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93 내가 주의 법도들을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 때문에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94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들만을 찾았나이다" (119:92~94)
92절은 가정법입니다. 하마터면 그럴 뻔했다는 고백입니다. 고난에서 의미를 찾지 못했다면 그는 떨어지는 별 같았을 것입니다. 89절에서 하늘에 붙어 있던 별이 궤도를 잃고 떨어질 뻔 한 것입니다.
다윗이 두려워한 '멸망'을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절망과 신앙의 이탈로 읽고 이렇게 위로합니다. "고난에서 지켜지지는 않았어도 고난 속에서 멸망하는 것에서 지켜졌다면, 우리에게는 '내가 헛되이 손을 씻었다'고 말할 이유가 없다."
성도 여러분, 이것을 정확히 붙드십시오. 말씀은 고난을 없애는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고난 한가운데서 무너지지 않게 붙드는 힘이었습니다.
오늘 한 절 묵상이 그대로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단지 고난을 피하게 해 주는 수단이 아니라, 고난 한가운데서 멸망하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94절, 오늘 본문에서 가장 겸손한 한마디가 나옵니다.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다윗은 "주는 내 것이니이다"라고 하지 않고 "나는 주의 것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앞의 것이 더 높은 주장이지만, 뒤의 것이 더 겸손한 자기 내어드림입니다. 그리고 그는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입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권을 근거로 삼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95절도 놓치지 마십시오. "악인들이 나를 멸하려고 엿보오나 나는 주의 증거들만을 생각하겠나이다."
여기 '엿보오나'(카바)는 본래 간절히 기다리다, 소망하다라는 신앙의 단어입니다. 이사야 40장 31절의 '앙망하다'가 바로 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악인들이 내 파멸을 간절히 기다리는 데 쓰였습니다. 좋은 단어라도 대상이 틀어지면 이렇게 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마주 노려보지 않습니다. 시선의 문제입니다. 누구를 오래 보느냐가 무엇이 되느냐를 결정합니다.
"96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 (119:96)
여섯 주석이 모두 이 한 절 앞에 멈춰 섭니다. "이 절은 전도서의 요약이라 해도 좋다." 세상의 모든 사업은 한때를 누리다 헛것이 되고,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계명들 안에서만 우리는 그 답답한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여기 '완전한 것'(티클라)은 성경에 한 번만 나오는 말로, 인간의 지혜와 문명과 권력과 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눈부신 성취조차 '끝'(케츠)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나는 모든 완전한 것의 끝을 보았다. 끝을 보게 되는 완전이라니, 참으로 가련한 완전이여!" 실제로 다윗은 다 보았습니다. 가장 강한 골리앗이 쓰러지고, 가장 빠른 아사헬이 따라잡히고, 가장 지혜로운 아히도벨이 어리석어지고, 가장 아름다운 압살롬이 흉하게 되는 것을.
그런데 후반이 반전입니다.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 유한한 모든 것에서 나는 한계 요인을 봅니다. 그러나 주의 계명들은 참된 자유를 뜻합니다. 우리는 계명을 울타리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계명을 광활한 평원으로 봅니다.
3. 종일 읊조리니 꿀보다 답니다 (97~104절)
"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119:97)
여기서 시의 결이 바뀝니다. "조용한 간주(quiet interlude)"입니다. 176절 가운데 청원이 단 한 줄도 없는 자리가 이 여덟 절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나를 구원하소서" 하던 사람이 이제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랑한다고, 그리고 달다고 말할 뿐입니다.
첫 단어가 감탄입니다. 히브리어로 '마-아하브티',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그리고 사랑은 반드시 흔적을 남깁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생각하기를 즐긴다.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다는 것은 그것이 그의 묵상이었다는 데서 드러난다." "종일"(콜-하욤)을 놓치지 마십시오. 밤에 조용하고 한가할 때만이 아닙니다. 일과 사람으로 가득한 낮에도 그의 일상적인 생각들 사이사이에 선한 생각이 짜여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새벽 삼십 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루의 결 전체가 말씀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2).
"98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99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100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 (119:98~100)
이 비교는 교만한 우월함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더 직접적이고 우월한 지혜를 가지신 주님을 높이는 말입니다. 즉 "나는 너희보다 낫다"가 아니라 "내가 배운 그분이 너무나 좋으시다"입니다. 자랑의 대상이 자기가 아니라 선생님입니다.
하늘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자들에게 감추어지고 '어린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눅 10:21).
"묵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설교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스승들보다 더 깨닫게 되는데, 그들이 할 수 없는 일, 곧 우리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여러분의 마음속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말씀 앞에 홀로 앉을 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게 설교하게 됩니다. 그것이 새벽에 나오는 이유입니다.
"101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102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104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119:101~104)
101절과 102절을 붙여 읽으십시오. 101절은 내가 한 일입니다. 발을 금했습니다. 102절은 주께서 하신 일입니다. 주께서 가르치셨습니다. 102절의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로-사르티)에서 '수르'는 궤도에서 비켜서는 것, 곁길로 빠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기가 궤도를 지킨 비결을 자기 의지로 돌리지 않습니다. 여기 성경적 진리의 보증인이 계시고, 제자의 눈을 열어 그것을 보게 하시는 유일한 분이 계신다.
앨런의 문장이 오늘의 압권입니다.
"토라는 하나님이 사람 손에 넘겨주며 알아서 잘 써 보라고 하신 DIY 설명서가 아니라, 평생에 걸친 수업의 기록된 부분이다." 성경은 조립 설명서가 아닙니다. 사 놓고 혼자 씨름하는 매뉴얼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계속 곁에 계신 수업의 교재입니다. 그러니 오늘 아침 성경을 편 것은 자료를 연 일이 아니라 수업에 들어간 일입니다. 그 선생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그리고 103절, 두 번째 감탄입니다. '단지요'(니믈레추)는 성경에 여기 한 번만 나오는 말로, 혀끝에 부드럽게 감기는 매끄러움과 달콤함을 함께 뜻합니다. "꿀은 달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훨씬 더 달다." 단 것은 정보가 아니라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 맛은 깨달음과 순종하는 삶으로 이어질 때에만 납니다. "영적인 미각", 그것은 경험으로 우리 자신에게는 확증되지만 남에게는 건네줄 수 없는 그런 증거 말이다."
그리고 104절, 뜻밖에도 미움으로 끝납니다. 사랑으로 시작한 자리가 미움으로 닫힙니다. 모순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총명해질수록 죄에 대한 미움은 더 깊이 뿌리를 내립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시 97:10).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한 분께 이르러야 합니다. 하늘에 굳게 선 그 말씀이 어디로 오셨습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만물을 붙드시는 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
그러므로 96절의 '심히 넓은 계명'도, 103절의 '꿀보다 단 맛'도 결국 한 인격에게로 모입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 베드로가 왜 떠나지 못했는지 이제 알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맺는 말
서른 살의 빌리 그레이엄은 가장 가까운 친구가 신앙을 떠나는 것을 보고 성경의 신뢰성에 깊은 회의에 빠졌습니다. 그는 산길로 올라가 기도했고, 거기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로 결단했습니다. 그 결단 뒤에 영적 능력이 돌아왔고, 그는 한 세기의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산에서 얻은 것은 새로운 증거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하늘에 굳게 서 있던 것 위에 자기를 세운 것이었습니다.
오늘 묵상 에세이에서 하용조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지식이 없는 지혜는 능력이 없다. 지혜가 없는 지식은 사람을 해친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참지식은 내 경험과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성령께서 부어 주셔야 한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손에 있는 이 책이 별들을 제자리에 붙들어 두는 그 말씀입니다. 세상의 모든 완전한 것은 끝이 있습니다. 우리의 건강도, 우리의 일도, 우리가 쌓아 온 것들도 언젠가 끝을 만납니다. 그러나 끝이 없는 한 가지가 있고, 그것이 오늘 내 입에서 답니다. 한 주간의 첫날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나갑시다.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고 저녁까지 그 맛이 입에 남아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찬양
새찬송가 200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 오늘의 찬송.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 샘이로다" — 93절과 103절의 단맛을 한 곡에 담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내가 지금 붙들고 있는 것들 가운데 '끝이 있는 완전'(96절)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끝나는 날에도 남을 한 가지를 위해 이번 주 무엇을 하겠습니까?
내 하루에서 말씀이 놓이는 자리는 '새벽 삼십 분'입니까, '종일'입니까(97절)? 오늘 일과 중 말씀 한 구절을 다시 꺼낼 지점 하나를 정한다면 언제입니까?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가 흔들리는 시대에 하늘에 굳게 선 말씀 위에 서게 하시고, 세상의 논리가 아니라 주의 규례대로 움직이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우리의 성경 읽기가 'DIY 설명서'를 뒤적이는 일이 아니라 선생님이 계신 수업에 들어가는 일이 되게 하시고, 한 주간의 첫날을 여는 성도들의 입에 그 단맛이 남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