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는 눈, 큰 평안
본문: 시편 119편 153절 ~ 168절
여는 말
어제 우리는 두 개의 가까움을 보았습니다. 악을 따르는 자들이 가까이 왔고(150절), 그러나 주께서 더 가까이 계셨습니다(151절).
오늘 열여섯 절은 바로 그 자리에서 이어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세 번 '보다'가 나옵니다. 153절 "나의 고난을 보시고", 159절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랑함을 보옵소서", 그리고 168절 "나의 모든 행위가 주 앞에 있음이니이다."
앞의 여덟 절(레쉬)은 이 시편에서 탄식이 가장 격해지는 자리입니다. 여덟 절 안에서 "나를 살리소서"가 세 번 터져 나옵니다(154·156·159절).
그런데 뒤의 여덟 절(신·쉰)은 정반대입니다. 청원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상황이 바뀌어서가 아닙니다. 161절을 보면 고관들은 여전히 그를 핍박하고 있습니다. 오늘 새벽, 살려 달라고 세 번 외친 사람이 무엇을 내밀었고, 어떻게 그 자리에서 큰 평안에 이르는지를 보려 합니다.
1. 나의 고난을 보소서 — 하나님을 변호사로 (153~156절)
"153 나의 고난을 보시고 나를 건지소서 내가 주의 율법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154 주께서 나를 변호하시고 나를 구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리소서" (119:153~154)
첫마디가 "보시고"입니다. 재판관 앞에 선 사람이 판사에게 하는 말입니다. 내 형편을 눈여겨봐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그렇게 보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출 3:7).
154절의 '변호하시고'는 히브리어 리브, 법정 전문 용어입니다.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언약 소송 대리인으로 쓰던 바로 그 말입니다. "내 송사를 변론하소서. 주께서 내 후견인이자 변호인이 되시고, 나를 주의 의뢰인으로 삼으소서." 그리고 못을 박듯 묻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송사를 변론하지 않으시면 누가 하겠는가?" 이 질문에 신약이 대답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그리고 '구하사', 곧 속량입니다. 어제 151절의 '가까우시니이다'와 오늘 154절의 이 말이 둘 다 기업 무를 자, 곧 고엘의 어휘입니다. 고엘은 곤경에 처한 친족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의 모든 빚을 떠맡아 갚으며, 그의 모든 필요를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욥이 잿더미에서 붙든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욥 19:25).
룻이 밤중에 보아스의 발치에서 한 말도 그것이었습니다. "이르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룻 3:9).
그리고 그 고엘이 누구신지를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155절이 어두운 그림 하나를 놓습니다.
"구원이 악인들에게서 멀어짐은 그들이 주의 율례들을 구하지 아니함이니이다."
여기 악인은 율례를 지키지 않는 자가 아니라 율례를 찾지도 않는 자입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형통할 때 그분의 율례를 한 번도 찾지 않은 자들이, 역경에 처했을 때 어떻게 그분의 은총을 구해 얻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156절, "여호와여 주의 긍휼이 많으오니 주의 규례들에 따라 나를 살리소서." '긍휼'(라하밈)은 '자궁'을 뜻하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어머니가 태중의 아이를 향해 느끼는 그 본능적인 애착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기계적인 인과응보가 아니라 언약 백성을 향해 끓어오르는 애정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시 103:13).
2.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소서 (157~160절)
"157 나를 핍박하는 자들과 나의 대적들이 많으나 나는 주의 증거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 159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랑함을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 (119:157, 159)
여기 이 연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의 짝이 숨어 있습니다. 156절 "긍휼이 많으오니"의 '많다'와, 157절 "대적들이 많으나"의 '많다'는 히브리어로 똑같은 한 단어(라빔)입니다. 대적도 '많고' 하나님의 긍휼도 '많습니다'. "그의 사랑은 우리를 향해 달려오며 모든 위협에 대등하다." 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 6:16).
158절도 놓치지 마십시오. "주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는 거짓된 자들을 내가 보고 슬퍼하였나이다." '거짓된 자들'(보게딤)은 겉으로는 충성스러운 척하며 언약을 은밀히 파기한 배신자들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분노하지 않고 슬퍼합니다. "그가 슬퍼한 것은 그들이 자기를 괴롭혔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노엽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59절입니다. 153절이 "나의 고난을 보시고"였다면, 159절은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랑함을 보옵소서"입니다. "나의 궁핍을 보소서"가 "나의 사랑을 보소서"로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걸립니다. "내가 사랑하니 살려 주소서"라니, 이것은 공로를 내미는 말이 아닙니까. "무죄 주장은 교만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마음에 대한 호소로 이해해야 한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제가 아빠 좋아하는 거 아시잖아요" 하고 매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청구서가 아니라 관계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매튜 헨리가 이 연에서 가장 따뜻한 관찰을 남깁니다.
"그는 '내가 주의 법도를 얼마나 잘 지키는지 보소서' 하지 않는다. 그는 많은 일에서 자기가 모자람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다만 '내가 그것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소서' 한다."
성적표를 내밀지 않습니다. 사랑을 내밉니다. 그리고 곧바로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라고 합니다. 근거는 결국 내 사랑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입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꼭 그랬습니다. 세 번 부인한 사람이 세 번 물으시는 주님 앞에서 내민 것은 실적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7).
160절이 이 연을 위로의 음조로 닫습니다.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들은 영원하리이다." 여기 '강령'은 문자적으로는 '머리'이지만 여기서는 '총계'라는 뜻이며, 그가 덧붙이는 한 문장이 중요합니다. "'~의 총계'는 '대체로'라는 뜻이 아니라 '~의 모든 부분'이라는 뜻이다."
곧 성경의 신뢰성은 "대체로 맞다"가 아니라 "한 부분도 빠짐없이 참되다"는 주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간이 흘러 정당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참되었고 "그것에 자기를 건 어느 누구도 저버린 적이 없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 1:24~25).
3. 그 눈 앞에서 — 떨림이 옮겨 가고 평안이 옵니다 (161~168절)
"161 고관들이 거짓으로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162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119:161~162)
161절에 두 개의 동사가 맞부딪힙니다. 고관들은 그를 사냥감처럼 '맹렬히 추격'합니다. 그런데 그 추격에 시인의 심장은 떨리지 않습니다. 심장이 요동치는 것은 오직 주의 말씀 앞에서입니다. 떨림이 옮겨 간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 떨지 않는 용기는 역설적으로 말씀 앞에서 철저히 떠는 데서만 나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마음은 박해에서 오는 유혹에 대해 무장되어 있다."
그리고 161절의 두려움 바로 옆에 162절의 기쁨이 옵니다. 박해 한복판에서 두려움과 기쁨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큰 노획물을 안고 돌아오는 용사입니다. 그러면서 곧바로 균형을 잡습니다. "그의 기쁨은 즉각적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에 있다." 주님이 같은 그림을 쓰셨습니다. "또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163절, 사랑에는 반드시 미움이 따라붙습니다. "나는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율법을 사랑하나이다." "사랑과 미움은 영혼의 앞장서는 애정이다. 이 둘이 바르게 고정되면 나머지는 따라서 움직인다." 무엇을 사랑할지 정하는 일은 곧 무엇을 미워할지 정하는 일입니다.
164절,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이 '일곱 번'을 오해하지 맙시다. 일곱은 완성과 완전함의 수이며, 문자적 기도 횟수가 아니라 온전한 헌신의 상징입니다. 하루를 틈 없이 채우는 삶을 말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7~18).
"이 시편에서 다윗은 탄식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탄식들이 그의 찬양을 밀어내지도, 찬양의 가락을 흐트러뜨리지도 못했다." 탄식과 찬양은 자리를 다투지 않습니다.
"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 168 내가 주의 법도들과 증거들을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 앞에 있음이니이다" (119:165, 168)
165절이 오늘의 정점입니다. 키드너는 이 절을 이 시편의 '안정' 주제의 정점, "고요한 증언"이라고 부릅니다. 모티어는 여기 샬롬을 온전함 — 하나님과의 평화, 사람과의 평화, 마음의 평화 — 으로 풀고, 앨런은 "넉넉한 안전"으로 옮깁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번민이 있다. 세상이 그들의 기대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다. 그것이 그들의 기대를 넘어서기 때문이며, 그 안에서 그들은 확실한 발판을 얻기 때문이다."
기대에 못 미치는 것과 기대를 넘어서는 것. 우리가 번민하는 이유가 여기 다 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밖으로는 큰 환난 중에 있으면서도 안으로는 큰 평안을 누릴 수 있다."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도 오해하기 쉽습니다. '장애물'(미크숄)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함정입니다. 고난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고난이 닥쳐도 그것에 걸려 신앙의 궤도를 이탈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166절에서 헨리는 소망과 순종을 한 절 안에 묶습니다. "여기 사람의 본분 전체가 있다.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아 눈을 거기 두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규칙으로 삼아 눈을 거기 두는 것." 그리고 "소망이 생생할수록 순종도 생생해질 것이다."
167절의 '내 영혼'은 시인의 생명 전체입니다. "몸의 연습은 신앙에서 유익이 적다. 우리는 그것을 마음의 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168절, 오늘 열여섯 절이 닫히는 자리입니다. "나의 모든 행위가 주 앞에 있음이니이다." 이 사실이 두렵게 들립니까.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위로였습니다. 아무도 그의 억울함을 알아주지 않고 고관들은 거짓으로 그를 몰아붙이는데, 하나님만은 그의 모든 길을 보고 계셨습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153절 "나의 고난을 보시고"로 열린 문이 168절 "나의 모든 행위가 주 앞에 있음이니이다"로 닫힙니다.
그리고 165절의 큰 평안이 누구에게서 오는지를 성경은 분명히 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엡 2:14). 평안은 원리가 아니라 한 인격이십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맺는 말
오늘 본문의 뒤 여덟 절에는 구해 달라는 기도가 한 줄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여덟 절이 앞 여덟 절의 절박한 호소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위기가 닥쳤을 때 급조된 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참호 속에서 급히 드린 기도가 아니었다." 고관들이 몰려오기 오래전부터 그의 마음은 말씀 앞에서 떨고 있었고, 그의 하루는 일곱 번 찬양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오늘 생명의 삶 묵상 에세이에서 송용원 목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것은 풍족한데 꼭 있어야 할 대상이 없는 것도 가난이라고. 집 안에 아무리 좋은 물건이 가득해도, 집을 나간 자녀가 돌아오기 전까지 부모는 가난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사람은 자기에게 꼭 있어야 할 그 무엇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절대자를 찾습니다.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할 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이미 우리의 고엘이 되어 주셨습니다. 세 번 외친 "나를 살리소서"는 십자가에서 이미 응답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잘 지키지 못한 것 때문에 기도의 자리를 피하지 말고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소서" 하며 나아갑시다. 그리고 사람 앞에서 떨던 그 떨림을 말씀 앞으로 옮깁시다. 거기에 큰 평안이 있습니다.
오늘의 찬양
새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 — "내 영혼 평안해" — 165절 "큰 평안이 있으니"를 그대로 노래합니다.
〈주만 바라볼찌라〉 — 161절,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하나님께 대한 경외로 시선을 옮기는 곡입니다.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하나님께 기도할 때 나는 무엇을 근거로 내밉니까? "제가 이만큼 했습니다"입니까, "제가 이만큼 사랑합니다"입니까(159절)? 오늘 그 기도를 한 문장으로 바꿔 봅시다.
지금 나를 가장 떨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평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161절)?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주께서 보고 계신다는 사실(168절)이 위로가 됩니까, 부담이 됩니까?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 성도들 가운데 억울함과 오해로 마음이 눌린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변호자가 되어 주시고, 그들의 고난을 보시고 살려 주소서.
참호 속의 급한 기도가 아니라 평소에 쌓아 온 말씀과 찬양 위에 선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형편이 바뀌지 않아도 큰 평안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