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우신 분이 가까이 계시니
본문: 시편 119편 137절 ~ 152절
여는 말
어제 우리는 눈물로 끝나는 자리를 보았습니다.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136절). 그런데 오늘 본문의 첫마디를 보십시오. 울던 사람이 고개를 들고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137절). 그는 세상을 향해 항의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합니다. 이것이 성경적 탄식의 순서입니다.
오늘 열여섯 절은 두 연입니다. 차데(137~144)와 코프(145~152). 그런데 이 둘은 한 줄기입니다.
앞의 여덟 절은 고백입니다 —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말씀도 의롭습니다. 뒤의 여덟 절은 그 고백이 부르짖음이 된 자리입니다. 144절에서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하던 사람이, 145절에서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하고 무릎을 꿇습니다. 교리가 기도가 된 것입니다.
1. 의로우신 분이 의로운 명령을 주십니다 (137~140절)
"137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138 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니이다" (119:137~138)
이 연은 온통 한 단어로 짜여 있습니다. 히브리어 체데크, 곧 '의'입니다. 137절 주의 의로 시작해 144절 말씀의 의로 끝나는 수미상관이며, 그 사이에 시인의 탄식이 놓여 있다고 봅니다.
137~138절에서 하나님의 의를 세 층으로 나눕니다. 본성의 의, 통치의 의, 계명의 의입니다.
"그분은 그분이신 그대로이실 뿐 아니라 마땅히 그러하셔야 할 그대로이시며, 모든 일에서 그분께 합당하게 행하신다. 하나님 안에는 모자란 것도 어긋난 것도 없다."
모세가 마지막 노래에서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신 32:4).
'판단'은 주님의 생각을 드러내고, '증거들'은 주님 자신을 드러내고, '명령하신'은 주님의 뜻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그의 결론이 오늘 새벽의 첫 번째 기둥입니다.
"그러므로 의로우신 그분이 의로운 명령을 주신다. 그분과 그분의 말씀은 하나다."
성경의 권위는 책의 속성이 아닙니다. 말씀하신 분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신뢰성에 대한 신뢰는 주님 자신에 대한 신뢰에 정비례한다."
139절, "내 대적들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정이 나를 삼켰나이다." '삼켰나이다'는 '소멸시키다, 근절하다'는 말입니다. 뜨거움이 도리어 자기를 태워 버릴 지경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소진된 이유를 보십시오. 자기가 손해를 봐서가 아닙니다. 대적들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열정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 2:17). 성도의 거룩한 분노는 예수님의 것과 같은 종류여야 합니다. 내가 무시당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무시당하셔서 아픈 것입니다.
140절 '심히 순수하므로'의 히브리어 체루파는 금속을 도가니에 넣어 불순물을 걷어 내는 제련의 말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시 12:6). 그 말씀을 빛과 사랑 안에서 받으면 "그것이 우리를 세속성과 육신적 사고의 찌꺼기에서 정련해 낼 것이다."
2. 미천한 자리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고백 (141~146절)
"141 내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나 주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142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 143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119:141~143)
141절이 이 사람의 실제 형편입니다. 미천했고, 멸시를 당했습니다.
"다윗은 경건하나 가난했다. … 다윗은 가난하나 경건했다."
"주와 그 말씀의 탁월하심은 그의 성도들의 고난과 수치로 인해 손상을 입는다." 성도의 고난은 신정론의 문제이기 전에 하나님의 명예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자기 처지 개선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세상에 의를 세우시는 일로 향합니다.
"시편 기자는 율법을 고수함으로 말미암아 성공과 부보다는 어려움을 당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보상 때문이 아니라 율법이 참되기 때문에 율법에 참여한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붙드는 이유는 그것이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참이기 때문입니다.
142절,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영원한 의와 영원한 나라와 영원한 사랑의 삼중주입니다. "여호와께서 옛적에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렘 31:3). 그리고 주님이 친히 못을 박으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143절의 '환난과 우환'은 '좁음'과 '압박'의 말입니다. 삶의 공간이 조여 오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조여 오는 자리에서 그는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갖가지 즐거움이 있는데, 성도들은 환난과 우환 가운데 있을 때 종종 그것을 가장 달게 누린다."
144절이 이 연의 결론이자 오늘 본문의 경첩입니다.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시편에서 '생명'은 대개 박해의 고통과 대비되는데 여기서만 유일하게 토라를 깨닫는 일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사는 길이 곧 깨닫는 길입니다. "그는 '더 많은 계시를 주소서' 하지 않고 '더 많은 총명을 주소서' 한다."
그리고 145~146절, 그 기도가 부르짖음으로 터집니다.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키리이다"(145절).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지키리이다"(146절).
두 절이 똑같은 모양입니다. 부르짖음 + 간구 + 다짐. "우리가 구원을 부르짖어야 하는 것은 그 편안함과 위로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더 기쁘게 섬길 기회를 얻기 위해서다."
코프 연 전체의 구조를 야고보서 한 절로 정리합니다. "두 반쪽은 야고보서 4:8에 대응한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145~148) '그리하면 그가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149~152)."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 4:8).
3. 두 개의 가까움 (147~152절)
"147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148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119:147~148)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내가 앞질러…', '내 눈이 앞질러…'. 새벽을 앞지르고 야경을 앞지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두 절이 함께 기도와 성경 묵상의 24시간 시간표를 이룬다고 정리합니다.
147절의 '날이 밝기 전'은 히브리어 네쉐프, 빛이 세상을 장악하기 전의 짙은 미명입니다. 세상을 밝히는 빛이 오기 전에 자기 영혼을 밝힐 빛을 먼저 구하러 나간 것입니다.
148절의 '새벽녘'은 아쉬무로트, 파수꾼의 경점을 뜻하는 군사 용어입니다. 묵상이 여가가 아니라 영혼을 지키는 파수 근무라는 뜻입니다. 복수형으로 쓰인 것은 어쩌다 한 번의 밤샘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지켰음을 나타냅니다. "간절한 새벽 기도가, 그보다 더 이른 기록된 토라 연구와 짝을 이룬다."
그리고 이 시간표를 가장 완전하게 지키신 분이 계십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149절에서 기도의 근거가 바뀝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내 소리를 들으소서 여호와여 주의 규례들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 앞에서는 자기 헌신을 내밀었는데, 여기서는 주의 인자하심을 내밉니다. 기도는 결국 인간의 서약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에 근거합니다.
"150 악을 따르는 자들이 가까이 왔사오니 그들은 주의 법에서 머니이다 151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들은 진리니이다" (119:150~151)
두 절이 히브리어로 똑같은 동사 '가까이'로 시작합니다. 150절, 악을 따르는 자들이 가까이 왔습니다. 151절, 여호와께서 가까이 계십니다.
"위협은 얼버무려지지 않는다. 다만 더 큰 사실에 의해 제 자리에 놓인다."
성경은 위험을 축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말 가까이 왔습니다. 다만 그것보다 더 가까운 분이 계실 뿐입니다. 헨리가 이렇게 씁니다. "그들이 나를 멸하려고 가까이 옵니다. 그러나 주여, 주는 나를 구원하시려 가까이 계십니다. 그들보다 강하시니 나를 도우실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보다 더 가까이 계시니 곧바로 도우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삶의 위협이 가까울수록 주님이 더 가까이 계신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7).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 145:18).
152절이 이 연을 닫습니다.
"내가 전부터 주의 증거들을 알고 있었으므로 주께서 영원히 세우신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
'전부터'(케뎀)는 태초의 시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자기 전부를 걸어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도 여러분, 137절의 "주는 의로우시고"와 151절의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가 만나는 자리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면 죄인인 나는 어떻게 됩니까. 이 질문의 답이 복음입니다.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6).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하나님의 의는 나를 정죄하는 잣대였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살리는 선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로우신 분이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
겟세마네에서 그분에게도 두 개의 가까움이 있었습니다. 배신자가 가까이 왔고, 아버지가 가까이 계셨습니다.
맺는 말
오늘 생명의 삶 묵상 에세이에서 이상준 목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에 분별력을 더하려면 칭찬이 아니라 진리 위에 인생을 세우라고. 칭찬은 때로 상대방이 내 마음에 돈봉투를 밀어 넣는 것과 같아서, 이유와 대가 없이 자꾸 받으면 자신과 타인에 대한 관점에 왜곡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입에는 쓰지만 영혼에는 다디단 약이 되는 진리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맺었습니다. "정답을 아는 사람은 모두가 자신과 반대편에 서 있어도 걱정하지 않는다."
오늘 본문의 사람이 정확히 그 사람입니다. 그는 미천했고, 멸시받았고, 환난과 우환이 사냥꾼처럼 그를 따라잡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시비를 걸지 않았습니다. 형편이 나빠졌다고 해서 하나님이 달라지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 새벽이 바로 147절의 그 시간입니다. 날이 밝기 전, 세상의 빛이 오기 전에 우리는 나왔습니다. 가까이 온 것들 때문에 흔들릴 때마다 이렇게 되뇌며 하루를 나갑시다.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오늘의 찬양
〈예수 하나님의 공의〉
〈오늘 이 곳에 계신 성령님〉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나는 말씀을 '통하니까' 붙듭니까, '참이니까' 붙듭니까? 최근 응답이 없던 기도 앞에서 내 신뢰가 어떻게 흔들렸는지 정직하게 적어 보십시오.
지금 나에게 '가까이 온 것'은 무엇입니까(150절)? 그것과 하나님 중에 내 마음은 실제로 어느 쪽을 더 가깝게 느끼고 있습니까?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책의 권위가 아니라 말씀하신 하나님의 성품으로 붙들게 하시고, 시대의 조롱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위협이 가까이 온 성도들의 가정과 일터에 주께서 더 가까이 계심을 실감하게 하시고, 새벽 제단이 습관을 넘어 '앞지르는' 갈망의 자리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