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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 시편 119편 105-120절

2026.09.08큐티와 묵상

한 걸음의 빛, 갈라지는 두 길

본문: 시편 119편 105절 ~ 120절

여는 말

어제 우리는 하늘에 굳게 선 말씀이 내 입에서 꿀보다 달아지는 자리까지 걸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현실입니다. 고난이 매우 심하고(107절),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고(109절), 악인들이 올무를 놓았습니다(110절). 어제의 그 조용한 간주는 하루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앨런이 오늘 앞부분에 붙인 제목이 「비바람이 몰아쳐도(Come wind, come weather)」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관찰합니다. "탄식 모티프는 오히려 이 헌신을 도드라지게 하는 효과를 낸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의 결심은 더 강해진다." 오늘 본문에는 아마 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 하나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섯 주석이 하나같이 그 구절을 붙들고 같은 말을 합니다. 이 빛을 낭만에서 끌어내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 아래에 서면, 사람의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1. 쬐라고 준 빛이 아니라 걸으라고 준 빛 (105~108절)

"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06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119:105~106)

먼저 105절의 두 단어를 나누어 보십시오. '등'(네르)과 '빛'(오르)입니다. "아마도 등불은 다음 한 걸음을 밝히고, 빛은 앞의 길 전체를 밝힌다." 네르는 발 앞의 웅덩이와 걸림돌을 피하게 해 주는 미시적이고 즉각적인 인도이고, 오르는 인생의 궤적 전체를 조망하게 해 주는 거시적인 방향성입니다. 토라는 "어두운 길을 위한 하나님의 손전등"이라는 것입니다. 손전등은 산 전체를 보여 주지 않습니다. 발 앞 한 걸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 한 걸음이면 밤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나의 유익을 위한 편리한 지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선택입니다.

우리는 105절을 어떻게 씁니까. "이 직장을 갈까요, 저 직장을 갈까요, 주여 등불을 비추소서." 그런데 키드너는 그것이 이 절의 용도가 아니라고 못을 박습니다. 이 빛은 어느 길이 유리한가를 알려 주는 빛이 아니라 어느 길이 옳은가를 알려 주는 빛입니다. 또 하나, 이 빛은 쬐며 쉬라고 주어진 빛이 아니라 걸으라고 주어진 빛입니다. 성경 공부만 하고 걷지 않으면, 등불을 켜 놓고 앉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잠 6:23).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벧후 1:19).

그리고 106절, 맹세입니다. "말씀에 대한 헌신 안으로 우연히 떠밀려 들어가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정확한 말입니다. 사람은 표류해서 신앙에 도달하지 않습니다. 표류는 언제나 반대 방향입니다. 헨리도 같은 자리에서 말합니다. "정직한 사람은 자기 말을 지킬 것이다. 우리는 우리 해가 되도록 맹세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말할 수 없이 우리 해가 될 것이다."

"107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108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 입이 드리는 자원제물을 받으시고 주의 공의를 내게 가르치소서" (119:107~108)

108절의 '자원제물'을 놓치지 마십시오. 헨리는 이것을 지갑의 예물이 아니라 입술의 예물, 곧 기도와 찬양으로 읽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자발성과 기꺼움이 많을수록 그분께 더 기쁨이 된다." 고난이 매우 심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 원망이 아니라 자원제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2. 손바닥 위의 생명, 그리고 영원한 기업 (109~112절)

"109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110 악인들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 나는 주의 법도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119:109~110)

109절의 "위기에 있사오나"는 히브리어로 '베카피', 문자적으로 '내 손바닥 위에 있습니다'입니다. 손바닥에 올려놓은 것은 어떻습니까. 바람 한 번, 부딪힘 한 번에 떨어집니다. 안전한 요새가 아니라 방어막 없는 손바닥, 그것이 이 사람의 형편입니다.

109절은 삶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감수하는 위험이고, 110절은 타인의 적의로 만나는 위험입니다. 그리하여 가능한 모든 위험이 다 포함됩니다. 오늘 성경사전이 짚듯 '올무'는 새와 짐승을 잡는 올가미이고, 성경은 이 말을 사망과 마귀의 덫에까지 확장해 씁니다.

그런데 두 절 모두 같은 자리에서 꺾입니다. "그러나 잊지 아니하나이다." "그러나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헨리가 이 두 절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생명을 잃을 위기에 있으나, 신앙을 잃을 위기에는 있지 않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자기 안전에 대한 그 많은 염려 가운데서도 그는 머리와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위한 자리를 찾아낸다."

"111 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112 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119:111~112)

111절의 '기업'(나할)이 큽니다. 앨런은 이것을 "'땅(기업)' 모티프를 더 높은 조성으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읽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기업은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땅 대신 말씀을 자기 몫으로 삼았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그런 지파가 하나 있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민 18:20).

"자기 몫을 이 세상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서 보는 데는 선한 사람의 마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112절, '기울였나이다'는 '나티티', 구부리다·기울이다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가만두면 저절로 이익 쪽으로 굽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말씀 쪽으로 기울이는 것은 본성의 관성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그것도 '영원히'(레올람), 곧 인생의 마지막 발뒤꿈치에 이를 때까지 그 기울인 마음을 풀지 않겠다는 서약입니다.

"순종 없는 기쁨은 경박함이고, 기쁨 없는 순종은 도덕주의다." 111절의 '즐거움'과 112절의 '기울인 마음'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합니다. 즐겁기만 하고 걷지 않으면 그것은 취미입니다. 걷기만 하고 즐겁지 않으면 그것은 노역입니다.

3. 그 빛 아래에서 길이 갈라집니다 — 사랑과 떨림 (113~120절)

"113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114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115 너희 행악자들이여 나를 떠날지어다 나는 내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리로다" (119:113~115)

빛이 켜지면 반드시 갈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113절의 첫 단어 '쎄아핌'은 성경 전체에 여기 한 번 나오는 말로, '두 갈래로 뻗다, 갈라지다'라는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엘리야가 백성을 향해 던진 조롱, "두 다리 사이에서 절뚝거린다"는 그 말과 같은 뜻입니다. "the men who are half and half" — 반은 이쪽, 반은 저쪽인 사람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

앨런의 번역은 더 아픕니다. "충성이 갈라진 사람들." 롱맨은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이들은 밖에서 쳐들어온 대적이 아니라 안에 있는 위선적 내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113절은 사실 우리를 향한 거울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남에게서가 아니라 자기 마음에서 미워했습니다. "선한 사람은 자기 생각에 대해 양심을 지킨다. 생각은 하나님께 드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절연의 언어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한 형태다." 무엇을 미워한다고 말하는 것이 이미 무엇을 사랑한다는 고백입니다. 아무것도 미워하지 않는 사랑은 사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해설도 같은 자리를 짚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는 것이 올바른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롬 12:9).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8).

그런데 115절의 결별 선언 바로 앞에 114절이 있다는 것을 보십시오. 떠나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피할 곳을 찾았습니다. 헨리의 구분이 좋습니다. "위험에서 지키는 은신처요, 위험 속에서 지키는 방패, 그 생명을 죽음에서 그 영혼을 죄에서 지키는 분."

"116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117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고 주의 율례들에 항상 주의하리이다" (119:116~117)

115절에서 그렇게 용감하게 선언한 사람이 116절에서 곧바로 "붙들어 주소서" 합니다. 그것도 두 절 연속으로. 헨리가 115절을 두고 "용감한 결심이다! 성도답고 군인답다" 하고 감탄했는데, 바로 그다음 절에서 그 군인이 무릎을 꿇습니다. '붙들어'(싸마크)는 스스로 서지 못하는 사람을 부축해서 넘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결단은 했지만 다리가 후들거린다는 고백입니다. 헨리의 문장이 이 두 절을 요약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붙드시는 동안만 서 있고, 그분이 옮기시는 만큼만 나아간다."

그리고 116절 후반,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이 기도가 왜 절박합니까. 고난 속에서 말씀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 헛된 망상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내 개인의 부끄러움을 넘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수치를 당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이미 응답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롬 10:11).

"118 주의 율례들에서 떠나는 자는 주께서 다 멸시하셨으니 그들의 속임수는 허무함이니이다 119 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찌꺼기같이 버리시니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사랑하나이다 120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심판을 두려워하나이다" (119:118~120)

118절의 '멸시하셨으니'(쌀리타)는 저울에 달아 본 결과 기준에 못 미쳐 가치 없는 것으로 판명된 물건을 밖으로 던져 버리는 행위입니다. 감정적 진노가 아니라 저울에 달아 본 뒤의 판정입니다. "그의 말씀과 어긋난 자는 그분과 바른 관계일 수 없다." 

119절의 '찌꺼기'(씨김)는 제련할 때 떠오르는 불순물입니다. 금속 세공인이 버리는 것, 시인이 악인을 거부한 것처럼 주께서도 그들을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네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사 1:22). 악인들은 자기를 순금처럼 포장합니다. 세상의 저울에서는 그것이 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광로에서는 본질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119절 후반이 이상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사랑하나이다." 심판을 보고 사랑이 커집니다. 그리고 120절에서 그 사랑이 곧바로 떨림이 됩니다. 키드너는 120절을 매우 강한 표현이라 하며 NEB를 소개합니다. "주를 향한 두려움이 내 살갗을 오싹하게 한다." "내 살에 소름이 돋는다."

헨리가 여기서 놓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노여움 아래 떨어진 자들을 조롱하기는커녕, 그는 자기 자신을 낮추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남의 심판을 보고 통쾌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무릎이 꺾이는 것. 사랑(119절)과 떨림(120절)이 나란히 있습니다. 이 시편에 미지근함은 없습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6).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그 빛의 근원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사람이어서 여기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확히 '반은 이쪽, 반은 저쪽'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등불이 마침내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요 12:35).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라." 이것이 105절의 진짜 명령형입니다. 쬐지 말고 걸으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히 12:2). 기쁨과 순종이 십자가에서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떨림도 홀로 떠는 떨림이 아닙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 2:12~13).

맺는 말

생명의 삶 설교 길잡이가 105절 자리에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를 놓았습니다. 죽기를 구하던 그가 다시 일어난 것은 상황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미한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받은 것은 인생 전체의 청사진이 아니었습니다. 다음 한 걸음이었습니다. 오늘 묵상 에세이에서 강준민 목사가 단테의 산길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젊은이에게는 늑대가, 중년에게는 호랑이가, 노년에게는 사자가 나타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음욕과 자만과 재물. 나이가 든다고 유혹에서 자유로워지지 않습니다. 유혹의 이름만 바뀝니다. 그러니 두 마음은 젊은 날의 문제가 아니라 평생의 문제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지도를 통째로 펼쳐 보여 주지 않으십니다. 손전등만 쥐여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불안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한 걸음이 보이면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을 가면 다시 한 걸음이 보입니다. 문제는 빛의 밝기가 아니라 걷느냐 마느냐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결심이 아닐지 모릅니다. 115절에서 용감하게 선언한 그 사람이 116절에서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십시오. 붙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두 번이나. 오늘 하루, 보이는 한 걸음을 걸읍시다. 두 갈래로 뻗으려는 마음을 정직하게 내려놓고, 붙들어 주시기를 구하며 나갑시다.

오늘의 찬양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

주 말씀 내 발의 등이요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나는 105절을 '어느 길이 유리한가'를 묻는 데 써 왔습니까, '어느 길이 옳은가'를 묻는 데 써 왔습니까? 지금 내 앞의 선택에서 옳음을 묻는다면 답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반은 이쪽, 반은 저쪽'인 영역은 어디입니까(113절)? 남의 두 마음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갈라진 지점을 오늘 하나만 이름 붙여 보십시오.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가 말씀을 쬐며 쉬는 공동체가 아니라 말씀을 따라 걷는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우연에 떠밀리지 않고 의도적으로 헌신하게 하소서.

생명이 손바닥 위에 놓인 것처럼 불안한 성도들을 붙들어 주시고, 결단은 했으나 다리가 후들거리는 지체들을 친히 부축해 그 소망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