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로 옮겨 오자
본문: 역대상 13장 1절 ~ 8절
여는 말
어제 우리는 헤브론의 사흘을 보았습니다. 열네 지파가 모였고, 스불론은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고" 왔고, 먼 북쪽 지파들이 나귀와 낙타와 노새와 소에 음식을 싣고 와서 서로를 먹였습니다. 그리고 그 장이 이렇게 닫혔습니다.
"40 … 곧 밀가루 과자와 무화과 과자와 건포도와 포도주와 기름이요 소와 양도 많이 가져왔으니 이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기쁨이 있음이었더라" (대상 12:40)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헤브론에는 제단이 없었습니다. 제사가 없고, 찬양이 없고, 기도가 없었습니다. 잔치는 있었는데 예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옵니다.
사흘 동안 먹고 마신 그 사람들이 끝날 때쯤 왕이 입을 엽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 오자."
그런데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아주 뜨거운 장면이 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모였고, 노래하고, 뛰놀고,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이 울립니다. 성경에서 이만큼 신나는 장면도 흔치 않습니다.
그런데 그 신나는 장면 한복판에 딱 한 단어가 조용히 놓여 있습니다. 그 단어의 결말은 내일 보겠습니다. 다만 여러분의 마음 한구석에 그 단어를 남겨 두십시오. 내일 그 단어가 일어설 것입니다.
1.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13:1~3)
"1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하고 2 다윗이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좋게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우리가 이스라엘 온 땅에 남아 있는 우리 형제와 또 초원이 딸린 성읍에 사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전령을 보내 그들을 우리에게로 모이게 하고 3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 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대상 13:1~3)
헤브론에서 즉위한 다윗왕의 첫 관심은 언약궤였습니다. 성벽도, 군대도, 세금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사무엘하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사무엘서는 군사적 소집으로 바로 시작하지만 역대기는 다윗의 내면적 동기와 신학적 근거를 먼저 제시합니다. 행동보다 이유를 먼저 적은 것입니다.
그 이유가 3절에 있습니다.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성도 여러분, "묻다"라는 이 말이 히브리어 다라쉬(דָּרַשׁ)입니다. 우리가 이 책에서 이미 만난 단어입니다.
"13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14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 (대상 10:13~14)
사울은 묻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묻겠다고 합니다.
"찾다/묻다"라는 동사는 "하나님을 뒤쫓아 수색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향한 삶 전체의 방향 설정"이라고.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여호와를 찾는 것은 그분에 대한 끊임없는 의존을 요구한다."
한 번 묻는 것이 아니라, 묻는 방향으로 인생 전체가 돌아서는 것입니다.
언약궤는 기럇여아림에 있습니다. 그곳은 이스라엘 땅 안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로 옮겨오자"고 합니다. 이 말은 지리적인 말이 아니라 영적인 말입니다. "궤를 우리의 것으로 삼자!" 궤가 "구함(다라쉬)의 대상"으로서 우리 삶의 중심에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다윗의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 오자'는 부름은 지리적 여행을 가리키는 만큼이나 영적 여행을 함축한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오늘 아침 우리에게 오는 첫 번째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셔서 우리가 그분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이 계신데 묻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책이 없어서 말씀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책상 위에, 머리맡에, 휴대폰 안에 있습니다. 다만 펴지 않는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 4:8)
2.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 (13:4~6)
"4 뭇 백성의 눈이 이 일을 좋게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 (대상 13:4)
오늘 본문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말이 "온 이스라엘", "온 회중", "뭇 백성"입니다. 2절에 "온 회중", 4절에 "뭇 백성"과 "온 회중", 5절과 6절에 "온 이스라엘", 8절에 "이스라엘 온 무리." 여덟 절 안에 여섯 번입니다.
다윗이 혼자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하고." 그리고 2절에서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말합니다.
"점점 넓어지는 원"입니다. 다윗 → 지휘관들 → 현재 모인 회중 → 온 땅에 남아 있는 형제들 → 시홀에서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 원이 계속 커집니다.
백성은 따라다니는 군중이나 공연의 관객 역할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협의와 결정에서 온전한 동반자다.
성도 여러분, 여기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일에서 성도는 관객이 아닙니다. 목사가 하고 장로가 하고 나머지는 구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동반자입니다.
신명기적 역사서(여호수아~열왕기)에서 중대한 일(언약궤 이동)을 앞두고 온 회중의 동의 절차를 부각시키는 표현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왕의 중대한 종교적 결단이 왕의 독점적 시각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보편적 시각에서 정당한 과업으로 승인되었다는 이 진술은,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공동체와 함께 분별하려 했던 역대기 특유의 '협의적 성격'을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역대기에서 백성과 협의하는 왕들이 곧 여호와를 찾는 왕들이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의논하는 왕이 묻는 왕입니다. 사람에게 묻지 않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께도 묻지 않습니다. 반대로 르호보암의 비극은 무엇이었습니까. 협의를 거부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대하 10:6~14).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
한 사람의 생각이 여러 사람의 공통 생각으로 확인됩니다. 다윗이 제안하고, 백성이 동의하고, 하나님이 비준하십니다.
이제 백성이 모입니다.
"5 이에 다윗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을 불러 모으고 기럇여아림에서부터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고자 할새 6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바알라 곧 유다에 속한 기럇여아림에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두 그룹 사이에 계시므로 그러한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았더라" (대상 13:5~6)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보통 성경은 이스라엘 전체를 말할 때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고 합니다. 이것은 가장 광범위한 땅의 묘사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쪽 경계에서 북쪽 경계까지를 이르는 말로, 이스라엘 전역을 가리킵니다."
이는 여호수아가 완수하지 못한 정복이 다윗 시대에 마침내 완성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약속이 다 이루어졌다!"
그리고 궤를 설명하는 6절의 표현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두 그룹 사이에 계시므로."
언약궤 덮개인 속죄소의 양 끝에 두 그룹이 있고 그 사이 속죄소에 하나님이 계십니다(출 25:20~22).
궤는 땅 위의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왕이 신하를 접견하듯 하나님이 백성을 만나십니다.
다윗이 옮겨 오려는 것이 이스라엘을 실질적으로 다스리시는 참 왕 여호와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통치자 위치에 다시 모심으로써 진정한 왕이신 여호와 아래서 이스라엘을 바르게 이끌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합니다.
왕이 왕좌를 가지러 갑니다. 자기 왕좌가 아니라 하나님의 왕좌를 말입니다.
3.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 그런데 새 수레 (13:7~8)
"7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8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 (대상 13:7~8)
성도 여러분, 축제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기럇여아림까지 10킬로 되는 거리를 지나는 행렬이 카니발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이 문장을 우리 교회에 그대로 주고 싶습니다. 예배는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의무의 완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에는 사람을 춤추게 하는 무엇이 있습니다.
"뛰놀며"가 히브리어 메사하킴(מְשַׂחֲקִים)인데, '웃다', '즐거워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 동사는 단순히 웃는 것이 아니라 격렬한 감정에 몸을 흔들며 터져 나오는 가시적인 환희를 의미합니다.
"힘을 다하여"는 베콜-오즈(בְּכָל־עֹז)입니다. 오즈는 '힘', '권능', '견고함'을 뜻합니다. 다윗과 온 백성은 온몸의 힘을 다해 하나님 앞에서 이 거룩한 몸부림을 수행합니다. 언약궤 운반이라는 과업이 하나님 앞를 향한 축제임을 선포합니다. 인간의 생명 에너지가 창조주를 향해 분출되는 이 예배의 현장은 다윗 왕조의 정당성이 예배에 있음을 잘 표현합니다.
다윗 왕조의 정당성이 예배에 있습니다. 군대가 아니라, 성벽이 아니라, 예배입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삼하 6:14)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시 149:3)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6)
그런데 8절 바로 앞, 7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새 수레입니다. 낡은 수레가 아닙니다. 아까운 것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정성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블레셋의 방식이었습니다. 사무엘상 6장 7절을 보십시오. 블레셋 사람들이 궤를 돌려보낼 때 무엇을 했습니까. "새 수레를 만들고." 그대로입니다.
생명의 삶 본문 해설이 이 대목을 아프게 짚습니다.
"다윗은 이전에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돌려보낼 때처럼 수레에 실어 옮기려 한 것입니다(삼상 6:7~8). 그러나 하나님의 궤는 레위인 중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고 옮겨야 합니다(민 4:15). 성물을 정리하는 일은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이 맡고, 고핫 자손은 성물을 만지면 죽는다고 율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수레에 싣고, 웃사와 아히오는 그 수레를 몹니다. 그들은 정해진 규례를 간과한 채 궤를 이동합니다."
"고핫 자손에게는 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성소의 직임은 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까닭이었더라"(민 7:9)
이스라엘이 곤경에 빠진 것은 참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이 그 시대의 세상의 방법을 그냥 따르는 것이 되었습니다. 역대기는 이를 즉각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이후 웃사의 죽음으로 이어질 위기의 씨앗을 조용히 심어 놓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은 아직 심판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오늘은 온 이스라엘이 모였고, 함께 의논했고, 힘을 다해 노래했다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다만 여러분 마음에 그 한 마디만 남겨 두십시오. "새 수레."
맺는 말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셋으로 꿰어 봅시다.
첫째, 다윗은 왕이 되자마자 궤를 찾았습니다. 사울은 묻지 않았고 다윗은 묻습니다. 문제는 궤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궤는 늘 이스라엘 땅 안에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궤가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혼자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천부장과 백부장, 온 회중, 시홀에서 하맛 어귀까지. 원이 계속 넓어졌습니다. 백성은 관객이 아니라 동반자입니다.
셋째, 온 무리가 힘을 다하여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하는 일은 마땅히 기쁨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 아래 새 수레가 놓여 있었습니다.
생명의 삶 묵상 에세이 「뜨거운 열심에 '말씀'이 없다면…」이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들었던 구호 "매삼주오!" — 성경을 매일 세 장, 주일에는 다섯 장씩 읽어 일 년에 일독을 하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온갖 자료가 넘쳐나는 오늘날, 오히려 성경을 꾸준히 읽는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설령 기도를 뜨겁게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면, 하나님 마음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하기 쉽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이렇게 읽습니다. "그 뜨거운 열심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의 법도'를 따르는 것이다. … 말씀의 궤도를 벗어나지 않을 때, 우리는 길을 잃지 않고 전인적인 성숙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같은 지면에 데이비드 플랫의 한 줄이 있습니다. "우리 삶의 승패는 하나님 말씀에 얼마나 귀 기울이고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성도 여러분, 열심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열심만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 10:2)
그러면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도 궤를 옮겨야 합니까. 우리도 새 수레를 걱정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궤가 우리에게로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12)
다윗은 궤를 옮기기 위해 온 이스라엘을 모아야 했습니다. 수레가 필요했고 소가 필요했고 며칠의 행렬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 모든 일이 이미 끝났습니다. 두 그룹 사이에 계시던 그분이 친히 우리 가운데로 걸어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그러니 이제 우리가 옮겨야 할 것은 궤가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이 "기럇여아림"에 머물러 계신 영역이 있습니까?
분명히 내 삶의 울타리 안에 있는데,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는 자리 말입니다. 직장의 결정, 자녀 문제, 돈 쓰는 방식, 관계의 갈등 —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묻지 않아서 멀어진 자리 말입니다.
오늘 그 자리를 "우리에게로" 옮겨 오십시오.
그리고 오늘 하루, 힘을 다하여 노래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뛰노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다윗이 그렇게 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 그 열심의 아래에 무엇이 깔려 있는지, 내일 아침 함께 확인하겠습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오늘의 찬양
새찬송가
20장 〈큰 영광 중에 계신 주〉 — 오늘의 찬송. 13장 6절 "여호와께서 두 그룹 사이에 계시므로", 곧 큰 영광 중에 좌정하신 그분을 왕좌에 모셔 오는 오늘 본문에 그대로 맞습니다. 예배 여는 찬송으로.
〈말씀하시면〉 —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 서리다" — 열정 위에 말씀을 얹는 오늘의 결론이며, 7절 "새 수레"에 대한 우리의 답입니다.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궤는 늘 이스라엘 땅 안에 있었지만 "우리의 것"은 아니었습니다(13:3). 지금 내 삶에서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는데도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는 영역은 어디입니까? 오늘 그 한 가지를 놓고 "여호와의 뜻이면"이라고 기도하겠습니까?
다윗은 천부장과 백부장, 그리고 온 회중과 의논했습니다(13:1~4). 나는 신앙의 중요한 결정을 혼자 내리는 편입니까, 공동체와 함께 분별하는 편입니까? 지금 누구에게 물어야 할 일이 있습니까?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가 어떤 일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먼저 구하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사역의 계획과 재정과 일정보다 앞서 "여호와의 뜻이면"을 묻게 하시고, 지도자와 성도가 함께 의논하여 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예배에 13장 8절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소서. 힘을 다하여 노래하며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그 기쁨이 뜨거운 감정에만 머물지 않고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이어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