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이 끝난 자리, 열리는 문
본문: 시편 119편 121절 ~ 136절
여는 말
어제 우리는 등불을 들고 한 걸음을 걷는 사람을 보았고, 그 빛 아래에서 갈라지는 두 길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심이 세상을 바꾸었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아닙니다. 세상의 빛이 되겠다는 결심에도 불구하고, 주의 종은 억압적이고 교만한 자들이 우세해지는 것을 본다 — 그리고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123절). 하나님의 진리는 무시되고, 결론은 오직 하나님의 행하심만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의 핵심어가 "주의 종"(122, 124, 125절)이라고 짚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지친 종의 아침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지친 종의 아침이 어디서 끝나는지 보십시오. 문이 열리고, 빛이 들어오고, 눈물이 흐릅니다. 오늘 열여섯 절이 걷는 길이 그것입니다.
1. 보증이 되어 주소서 — 눈이 다한 자리 (121~125절)
"121 내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사오니 나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나를 넘기지 마옵소서 122 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 교만한 자들이 나를 박해하지 못하게 하소서 123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 (119:121~123)
121절이 좀 당당하게 들립니다. "내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사오니." 그러나 이것은 자랑이 아니라 법정 진술입니다. 억압자들과 대조되는 자기 삶의 방향을 하나님 앞에 내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서 자기도 능동적 역할을 감당했다고 감히 호소합니다.
122절의 '보증하사'(아로브)는 남의 빚이나 법적 책임을 대신 떠맡기 위해 자신을 담보로 내어놓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이런 뜻입니다. "주여, 제 사건에 제 이름 대신 주의 이름을 걸어 주십시오." 스스로를 변호할 힘이 없는 사람이 창조주께 자기 법적 보증인이 되어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보증이 되신다. 그분이 그러시다면, 섭리가 온 세상에 맞선 우리의 보증이 될 것이다." —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 7:22).
그리고 123절, "내 눈이 … 피곤하니이다." 히브리어 '칼루'는 다 소진되었다, 고갈되었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눈이 뻐근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맹렬히 응시하다가 시력이 다해 버린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가 응시한 대상이 둘입니다.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 상황이 바뀌기만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을 보증하는 말씀이 언제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두 눈 부릅뜨고 확인하려 한 것입니다.
"자기 시간이 다 지나갔을 때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다 지치는 것은, 선한 사람들에게조차 흔한 연약함이다." 그리고 곧바로 이렇게 붙듭니다. "우리 눈은 쇠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은 쇠하지 않는다."
"124 주의 인자하심대로 주의 종에게 행하사 내게 주의 율례들을 가르치소서 125 나는 주의 종이오니 나를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 (119:124~125)
지친 사람의 기도가 무엇으로 바뀌는지 보십시오. "건져 주소서"가 아니라 "가르치소서, 깨닫게 하소서"입니다. 개인적 안전을 위한 정당한 기도가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고 깨닫기 위한 기도로 조바꿈됩니다. 헨리가 여기에 딱 맞는 권면을 남겼습니다. "어려운 때에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보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듣기를 더 원해야 하며, 성경의 예언을 아는 것보다 성경의 계명을 아는 데로 인도되기를 더 기도해야 한다." 어두운 시대에 우리는 자꾸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를 묻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를 물으라고 합니다.
2. 같은 동사, 두 번 — 그러므로 더 사랑합니다 (126~128절)
"126 그들이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께서 일하실 때니이다" (119:126)
여기가 오늘 본문 전반부의 절정이자 축(pivot)입니다. 지금은 여호와께서 일하실 때니이다. "'행하실 때니이다'(126절)는 '내가 행하였사오니'(121절)와 같은 동사입니다. 이것은 마치 '나의 모든 노력은 실패입니다. 주께서 넘겨받으소서'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한 단락이 같은 동사로 시작하고 같은 동사로 절정에 이릅니다. 121절, 내가 행하였습니다. 126절, 이제 주께서 행하실 때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정직한 아침입니까. 나는 할 만큼 했습니다. 정의와 공의를 행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대로입니다. 아니, 더 나빠졌습니다. 그때 나오는 말이 이것입니다. "주께서 넘겨받으소서."
126절의 '폐하였사오니'(헤페루)는 언약이나 맹세를 깨뜨려 법적 효력을 소멸시키는 말입니다. 이 동사가 토라와 함께 쓰였으므로 "그들이 언약을 파기하였다"로 읽을 수 있습니다. 몇 조항을 어긴 정도가 아니라, 토라가 이 세상에서 작동하지 못하도록 조직적으로 파기한 것입니다.
헨리가 여기서 가장 날카로운 대조를 놓습니다. "경건한 사람도 계명을 거슬러 죄지을 수 있다. 그러나 악한 자는 계명 자체를 없애 버리려 죄를 지어, 하나님의 법을 폐지하고 자기 정욕을 법으로 제정하려 한다." 그리고 이렇게 잇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는 악이 가장 대담해지고 죄악의 분량이 가득 찼을 때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어둠이 가장 짙어진 때가 하나님이 손을 대시는 때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호 10:12).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지 마십시오. "나는 더 못 하겠습니다"와 "주께서 행하셔야 합니다"는 결코 발 빼기가 아닙니다. 증거가 바로 앞뒤에 있습니다. 앞은 124~125절, 두 절 연속의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뒤는 이렇습니다.
"127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128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모든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119:127~128)
두 절의 첫 단어가 문제입니다. "그러므로"(알-켄). 논리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세상이 하나님의 법을 폐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 법을 더 사랑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러므로 나도 지쳤습니다"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학자들은 이 '그러므로'가 어색하다며 본문을 고치자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충성의 논리입니다. — 압박이 커질수록 더욱 헌신하는 것!
충성의 논리. 세상이 말씀을 버릴수록 나는 말씀을 더 붙듭니다. 사람들이 예배를 가볍게 여길수록 나는 예배를 더 무겁게 여깁니다. 이것은 계산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는 자기 성경을 자기 돈보다 더 사랑했다 — 금보다, 그렇다, 정금보다 더." 그리고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것은 금이 할 수 없는 일을 그에게 해 주었고, 세상 재물이 그를 저버릴 때 그의 편이 되어 줄 것이었다." 128절에는 '모든'(콜)이 세 번 나옵니다. 모든 법도들, 범사에, 모든 거짓 행위. 예외 조항이 없다는 선언입니다.
주님이 예고하신 것은 정확히 반대편입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 불법이 성하면 사랑이 식습니다. 그것이 보통의 논리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반대로 갔습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사랑이 더 뜨거워졌습니다.
3. 문이 열리면 빛이 들어오고, 그 빛으로 본 세상 앞에서 웁니다 (129~136절)
"129 주의 증거들은 놀라우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130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131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119:129~131)
지친 눈으로 시작한 아침이 여기서 갈라집니다. 129절 '놀라우므로'는 히브리어 펠라오트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 같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이적을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이적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에 붙였습니다. 성경 자체가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문체의 장엄함, 그 내용의 순결함, 그 부분들의 조화가 모두 놀랍다. 우리가 하나님의 증거에 감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것과 친숙하지 않거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다."
130절이 오늘의 심장입니다. '주의 말씀을 열면' — 이 '열림'을 두고 세 주석이 나란히 섭니다.
키드너는 '펼쳐짐, 문자적으로 열림'이라 하며 엠마오 길을 가리킵니다. 모티어는 문자역이 '문, 열림'이라며 이렇게 씁니다. "말씀이 문처럼 열릴 때 주님의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앨런은 아예 "주의 말씀의 계시"로 옮깁니다.
셋이 한 그림에 도달합니다. 말씀은 문입니다. 열리면 빛이 들어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더라"(눅 24:32).
그 빛이 누구를 깨닫게 합니까. '우둔한 사람들', 히브리어 페타임입니다. 머리 나쁜 사람이 아니라 아직 인도할 원리를 갖지 못한 미숙한 사람, 세상의 교만한 지식으로 굳어지지 않은 백지 상태의 마음입니다. 복음의 놀라움이 여기 있습니다. 말씀의 빛은 똑똑한 사람을 골라 비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131절의 '열고'는 130절과 다른 단어입니다. 이것은 굶주리거나 목마른 짐승이 헐떡이는 그림입니다.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 더위에 지치거나 거의 숨이 막힌 자가 신선한 공기 한 모금을 위해 헐떡이듯이." 말씀이 열리는 문이라면, 우리는 그 문 앞에서 헐떡이는 자여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132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던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33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 135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119:132~133, 135)
이 네 절은 기도입니다. 132절과 135절이 민수기 6장 제사장 축복의 반향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5~26). 성전 뜰에서 들었던 그 축복의 말을 자기 기도로 되돌려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 — 이것이 가장 안전한 기도입니다.
132절에서 헨리가 예리한 관찰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이 하시는 일을 구하지 않고 다만 그 얼굴의 미소를 구한다. 좋은 눈빛 하나면 충분하다." 그가 구한 것은 특별 대우가 아닙니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던 대로" — 다른 성도들이 받는 그 대접이면 족하다는 것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주목과 하나님의 선물을 구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준다. 그것은 서로 신뢰하기를 배운 동반자들 사이의 정당한 기대를 언어화한 것이다." -월터 브루그만
133절의 '주관하지 못하게'는 '주인 노릇 하지 못하게'입니다. 죄가 나를 부리는 상전이 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신약이 이 기도에 답합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134절 '구원하소서'는 '속량하다', 곧 요구되는 어떤 대가든 스스로 짊어지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그분을 만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그리고 135절, 두 번째 등에 불이 들어옵니다. 모티어가 이 단락에 붙인 제목이 '이중 필라멘트 등'입니다. 130절에서 켜진 말씀의 빛이, 단락이 끝나기 전에 135절의 주님의 얼굴빛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빛과 주님의 빛은 결국 같은 빛입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하나님의 얼굴빛은 이제 한 얼굴에 모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헨리의 한 줄이 오늘 아침의 기도가 될 만합니다. "세상이 내게 찡그릴지라도, 주는 내게 미소 지으소서."
"136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 (119:136)
빛으로 밝아진 자리가 눈물로 끝납니다. 모티어는 129절의 감탄과 136절의 눈물이 괄호를 이룬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지 안 사람은, 그 말씀이 짓밟히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시냇물'은 문자적으로 '관개 수로'입니다. 마르지 않고 흐르는 물길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분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주위를 둘러보고 율법을 무시하는 자들을 관찰할 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정죄가 아니라 애통입니다. 손가락질이 아니라 물길입니다. 헨리의 문장이 이 절의 전부를 담습니다. "죄인들의 죄가 성도들의 슬픔이다. 우리가 고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애통해야 한다." 선지자도 그렇게 울었습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렘 9:1).
그리고 마침내 그분이 우십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눅 19:41). 예루살렘이 그분을 죽이려 하던 그 주간에, 그분은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습니다. 헨리가 이렇게 잇습니다. "대개 은혜 입은 마음이 있는 곳에는 우는 눈이 있다. 슬픔의 사람이요 질고를 아는 자이신 그리스도를 닮아서."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그러니 126절의 기도가 언제 응답되었는지 이제 보십시오. "지금은 여호와께서 일하실 때니이다." 인간의 모든 노력이 실패로 판명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넘겨받으셨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갈 4:4)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 5:17). 그러므로 122절의 기도 "주의 종을 보증하사"도 이미 응답되었습니다. 우리의 보증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사건에 그분이 자기 이름을 거셨습니다.
맺는 말
로마의 압제와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 속에서, 시므온과 안나는 끝까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기 예수를 품에 안았습니다. 어두운 시대에 끝까지 기다린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은 여호와께서 일하실 때니이다"라는 기도가 성전 뜰에서 성취를 보았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눅 2:29~30).
2차대전 중 포로가 된 조종사 제이콥 드쉐이저는 단 3주 동안 빌려 본 성경으로 회심했다고 합니다. 성경을 빼앗기기 전에 그는 많은 구절을 외웠고, 이후 14개월의 독방 생활을 그 암송한 말씀으로 견뎠습니다. 문이 3주 열렸는데, 그 빛이 14개월을 밝힌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붙들 말은 이것입니다. 내 노력이 끝난 자리가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손을 터는 자리가 아니라 무릎을 꿇는 자리입니다. 내가 행하였습니다. 이제 주께서 행하소서. 그리고 그 사이에 나는 더 사랑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손에 그 문이 있습니다. 열지 않으면 빛은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 빛으로 세상을 본 사람은 반드시 울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눈물은 정죄의 눈물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보고 우신 그분을 닮은 눈물입니다. 오늘 하루, 헐떡이며 말씀 앞에 앉고, 주의 얼굴빛을 구하며, 아직 그 빛을 모르는 한 사람을 위해 울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찬양
새찬송가 366장 〈어두운 내 눈 밝히사〉 — 오늘의 찬송. "깊으신 뜻을 알고자 엎드려 기다리오니" — 125절과 130절의 기도 그 자체입니다.
〈부흥〉(고형원) —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 126절을 그대로 기도하는 곡.
〈아버지의 마음〉 — 136절의 눈물, 곧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노래합니다.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내가 "할 만큼 했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느끼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그 자리에서 손을 터는 대신 126절의 기도를 드린다면 어떤 문장이 되겠습니까?
내 눈물은 주로 내 문제 때문에 흐릅니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 때문에 흐릅니까(136절)? 오늘 이름을 부르며 울어 줄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가 세상이 말씀을 가볍게 여길수록 더 무겁게 붙드는 '충성의 논리' 위에 서게 하시고, 오래 기다리다 눈이 피곤해진 성도들에게 시므온과 안나의 아침을 허락하소서.
우리의 모든 성경 펼침이 '문이 열리는' 사건이 되게 하시고, 말씀이 가볍게 여겨지는 시대에 우리 교회가 정죄하는 입이 아니라 애통하는 눈을 갖게 하소서.